-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대목리 64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靑松沈公 載現 紀績碑(애국지사 청송심공 재현 기적비)
이 비는 구한말 왜적이 우리 국토를 강탈하여 식민통치를 자행할 저음 구국운동으로 결사대를 조직 항쟁한 애국지사 심재현 일명 맹권 공을 추모하여 세운 비다. 무릇 불후의 의거가 있을때 이를 발천하여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수비천양이 어찌 올바른 일이 아니리오.
공의 본관은 청송이니 고려 문림랑 휘 위승 휘 홍부를 시조로 려말 전리판서 휘 원부 호 악은선생은 정포은 이목은 선생과 같이 갈력 보국타가 여망에 동 72현이 두문동에서 순절하니 후인이 경현사와 두문동 서원에 봉향 추앙하고 자차로 후손이 합천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켜온 세거지이다. 휘 자광은 무과 훈련원정으로 병자호란에 유공 순절하니 인조왕 어사 시에 충의는 명천고하고 사생은 유일시라. 위국○백인하니 종차보왕기라 하고 증 좌승지 이향 이계서원하니 시위 공지 9대조요. 승지 공의 장질 휘 일삼은 효행으로 증 호조좌랑하고 향 명곡사 급 이계서원 이유 문집하니 진충효겸전의 가통이다. 고 휘 균환이요 비는 광산김씨 병현지녀로 1898년 무술 10월 16일 대양면 이계 자택에서 생 공하니 자유로 총명 호학하고 성도 강직하여 문중의 촉망을 받았다.
고종 인산에 참여차 상경한 강홍열 의사가 기미 3.1의거에 참가하고 독주선언문을 가지고 귀향하여 비밀리에 전군에 전파하였다.
공의 본관은 청송이니 고려 문림랑 휘 위승 휘 홍부를 시조로 려말 전리판서 휘 원부 호 악은선생은 정포은 이목은 선생과 같이 갈력 보국타가 여망에 동 72현이 두문동에서 순절하니 후인이 경현사와 두문동 서원에 봉향 추앙하고 자차로 후손이 합천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켜온 세거지이다. 휘 자광은 무과 훈련원정으로 병자호란에 유공 순절하니 인조왕 어사 시에 충의는 명천고하고 사생은 유일시라. 위국○백인하니 종차보왕기라 하고 증 좌승지 이향 이계서원하니 시위 공지 9대조요. 승지 공의 장질 휘 일삼은 효행으로 증 호조좌랑하고 향 명곡사 급 이계서원 이유 문집하니 진충효겸전의 가통이다. 고 휘 균환이요 비는 광산김씨 병현지녀로 1898년 무술 10월 16일 대양면 이계 자택에서 생 공하니 자유로 총명 호학하고 성도 강직하여 문중의 촉망을 받았다.
고종 인산에 참여차 상경한 강홍열 의사가 기미 3.1의거에 참가하고 독주선언문을 가지고 귀향하여 비밀리에 전군에 전파하였다.
합천의 유지 주경천 대양의 심재기 심재현 심재인 심진환 등 12동지가 의분심을 참을 수 없어 의사 배출의 산실인 수암정에 모여 밀의를 거듭한 후 거사일을 3월 19일 합천읍 시일로 약정하고 제반 준비를 서둘렀다. 당일 주동인사들은 준비된 태극기를 가지고 합천읍으로 잠입하여 오후 장꾼이 가장 많이 모였을 때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니 약 500여 명이 참가하여 의분에 넘친 함성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이 때 왜경들이 출동하여 심재기 외 16명을 검거하고 강제로 해산시켰다. 분심 충천한 군중들은 대양마정에 모여 익일 합천으로 출발 즉전 심재현은 군중을 향하여 우리가 시종일관 소기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서는 결사대 조직이 필요하니 자원자는 나오라고 외쳤다. 이에 응하여 손득용 이용선 김문기 추용만 이상우 배상룡 등 12명은 각자 서약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시위군중은 결사대를 선두로 읍내 광장에 돌입하였을 때 약속에 따라 각 면으로부터 참집한 군중 약 5백여 명이 합세하였다. 김영기는 군중을 향하여 나라 잃은 백성은 닭과 개 같음을 역설하고 조국독립을 위해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때는 오후 7시 군중은 결사대를 선두로 높이 든 태극기를 따라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읍내 거리를 시위한 후 경찰서를 포위하고 어제 체포된 심재기 외 16명 즉시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서장은 군중이 먼저 해산하면 석방하겠다고 고자세로 군중을 위압하려 하였다. 격분한 군중은 만세를 제창하면서 짓쳐 들어가니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결사대원 추용만은 태극기를 단 대나무 장대로 서장과 5,6명의 머리를 후려치고 결사대는 도끼와 몽둥이로 군중은 투석으로 항거하였으나 총검을 당할 수 없어 심재현 손득룡 이용선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3년 징역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공은 만기 출옥 후 은밀히 항일운동에 전념 중 몽상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정치의 무질서 6.25 동란 정계 혼란 등에 환멸을 느껴 자녀교육에 전념하다가 1961년 6월 9일 자택에서 별세하여 대양면 도리후산 유좌에 안장하고 배 현풍곽씨 인순 녀는 부덕이 있어 내조가 많았으며 1990년 나라에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자 여손이 장치민이 수비 대로방할새 일에 주손 순종여 5남 종석군이 청문어여어늘 여이문졸로 누사불획 이감기효성하여 거행장급 판결문하여 약서 여우하고 명왈
공은 만기 출옥 후 은밀히 항일운동에 전념 중 몽상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정치의 무질서 6.25 동란 정계 혼란 등에 환멸을 느껴 자녀교육에 전념하다가 1961년 6월 9일 자택에서 별세하여 대양면 도리후산 유좌에 안장하고 배 현풍곽씨 인순 녀는 부덕이 있어 내조가 많았으며 1990년 나라에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자 여손이 장치민이 수비 대로방할새 일에 주손 순종여 5남 종석군이 청문어여어늘 여이문졸로 누사불획 이감기효성하여 거행장급 판결문하여 약서 여우하고 명왈
황매산 맑은 바람 천추에 불어 있고 남강 강 푸른 물결 만고에 출렁이네 높고 깊은 공의 절의 천추에 빛나리니 우리 모두 거울 삼아 이 나라 보전하세
단기 4331년 무인 입추절 진양 하병우 찬 병서
심재현 자 태진 희진 동진 수석 종석, 제 삼권 질 어수, 제 재원 질 임수 희수 근수, 손 순종 순용 영기 순목 영○ 영희 순복 영봉 순홍 영천 영목 덕룡, 증손 성원 원석 태민 보훈 성보 상민 성훈 수영 매우
단기 4331년 무인 입추절 진양 하병우 찬 병서
심재현 자 태진 희진 동진 수석 종석, 제 삼권 질 어수, 제 재원 질 임수 희수 근수, 손 순종 순용 영기 순목 영○ 영희 순복 영봉 순홍 영천 영목 덕룡, 증손 성원 원석 태민 보훈 성보 상민 성훈 수영 매우
경북 합천군 대양면 대목리 870에 있는 애국지사 심재현 선생 기적비를 찾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주소가 잘못되어 있었다. 이 곳의 주소는 대목리 648-1이다.
하지만 주소가 잘못되어 있었다. 이 곳의 주소는 대목리 648-1이다.
애국지사 청송 심공재현 기적비
관리번호: 43-1-44
관리자: 문중대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 기적비는 청송 심공재현(沈載現: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8년 4월에 건립된 비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20일의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합천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틍하였던 심재기(沈載祺) 외 1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실에 분개하여 3월 20일 대양면민(大陽面民)들과 함께 제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0일 대양면 마정부락에 많은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 자리 에서 결사대를 조직할 것을 건의하여 김영기(金永琪)·손득룡(孫得龍)·이용선(李龍善)·추용만(秋鏞滿)·이상우(李相宇)·배상룡(裵祥龍) 등 12명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읍내 광장으로 시위 행진하였다. 읍내 광장에는 각 처에서 모인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합류 하여 대한독립만세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읍내를 시위 행진하고, 오후 7시경, 경찰서로 가서 그곳을 포위하고,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경찰서장과 일본 경찰이 나와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경찰서장은 먼저 해산하면 석방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격분한 그는 결사대원과 함께 시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시위군중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일 대구(大邱)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관리번호: 43-1-44
관리자: 문중대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 기적비는 청송 심공재현(沈載現: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8년 4월에 건립된 비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20일의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합천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틍하였던 심재기(沈載祺) 외 1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실에 분개하여 3월 20일 대양면민(大陽面民)들과 함께 제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0일 대양면 마정부락에 많은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 자리 에서 결사대를 조직할 것을 건의하여 김영기(金永琪)·손득룡(孫得龍)·이용선(李龍善)·추용만(秋鏞滿)·이상우(李相宇)·배상룡(裵祥龍) 등 12명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읍내 광장으로 시위 행진하였다. 읍내 광장에는 각 처에서 모인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합류 하여 대한독립만세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읍내를 시위 행진하고, 오후 7시경, 경찰서로 가서 그곳을 포위하고,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경찰서장과 일본 경찰이 나와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경찰서장은 먼저 해산하면 석방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격분한 그는 결사대원과 함께 시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시위군중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일 대구(大邱)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