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도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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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장단리 112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범은 사후에 피를 남기고 사람은 사후에 명을 남긴다는 옛말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은 있으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어려운 환경에도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한국 황실의 미력함을 개탄하고 나라에 몸을 받쳐 국권회복에 초개 같이 몸을 던진 독립투사가 있으니 이 분이 바로 12대장 권석도이시다. 의병 12대장의 휘는 석도요 자는 명구며 군호는 일이다. 권씨의 귀향은 안동이요 고령3중대광아부공신태사 휘 행이 시조이며 누전에 휘는 한공이요. 호는 일재며 시호는 문탄관은 도첨의 우정승 예천부원군이요 권문을 빛낸 현조이시며 3전에 조선조 3가대평에 이거한 감정공 휘 집덕이 입향조이다. 13대조의 휘는 시민이요 호는 삼괴당이며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문하생으로 거창 학림사에 향사를 드리고 있으며 9대조의 휘는 극찬이요. 호는 청암이며 호조좌랑이다. 조의 휘는 기요. 고의 휘는 위대이며 비는 파평윤씨 영종의 녀이다. 공은 서기 1879년 5월 28일 쌍암세제에서 태어났다. 공은 우수 6지로 출생하였으나 생활에는 지장없이 화기충만하고 산자수명한 고향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권대장은 8세 때에 함양군 상림죽장으로 이거하여 교촌서재에서 청운의 꿈을 품고 수학하였다. 공은 소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재능과 자질이 출중하였으며 효제하고 자상하였으며
풍채와 기상이 탁월하여 사우에 추중을 받았고 수학 중에도 후에 법관 노흥현 면장 김한호 등 친우들과 사냥을 즐겼으며 건장한 체격으로 비호같고 총 쏘는 솜씨가 비범하여 포호장군 별명도 붙었다. 공이 28세 때 일제 침략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왜놈들의 파렴치한 행동으로 국민정신을 말살하고 국권마저 상실되니 황제의 미력함과 국운이 쇠퇴함을 개탄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구례 고광순 의병장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구례 곡성 하동 산청 합천 진주 등 일대에서 왜병과 수십차 교전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후 화개 탑동 전투에서 고광순 의병장이 두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장군이 전사하자 적개심에 권대장은 의병을 규합하여 하동에 주둔한 왜병 수비대를 습격하니 사망 40여명 부상자 부지기수였다. 패보를 접한 진주왜경은 지원군을 보내니 중과부적으로 권대장은 섬진강으로 적을 유인하여 신출귀모한 도강전술로 섬멸하는 등 도처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후 하동 병양면 부근에서 동지 30여명과 자금 조달차 진주로 가는 도중 왜병의 추격을 받아 대병 봉화산으로 도주 중 총상을 입고 쌍암 질 영화 집에 피신하던 중 왜경들이 질의 가옥을 방화하자 야간도주하여 풍찬노숙하면서 각고면려 끝에 회복하였다. 그 후 1908년 투옥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진주감옥을 폭파하고자 화약을 입수하여 진주로 잠입 중 동지로부터 정보가 누설되어 피체되었다. 권대장은 살벌한 법정에서 당당한 자세로 나라를 도적질한 왜놈의 재판은 받을 수 없다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법정 모독죄가 추가되어 중형을 받아 복역 중 심야에 졸고 있는 간수 2명을 살해하고 구척 담을 월장하여 탈옥했다. 탈옥한 지 얼마 후 다시 붓장수로 변장하여 은밀히 활동하던 중 육지를 감출 수가 없어 다시 피체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진주경찰서에서는 수차 수감 탈옥한 자라 감시가 심하였고 손을 뒤로 돌려 묶고 팔관의 쇠뭉치를 채워 운신을 불능케 하였으며 상고를 하였으나 감형되지 않고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어 옥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 후 국사범에 대한 특구령 의거 6년 9개월 만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가출되었으나 가정은 파산되었고 출옥을 고대하던 부친과 부인 노씨마져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9세였으며 함양군 유림의 천거로 백전면 매취재에 열녀비가 세워졌다. 그 후 3.1운동이 일어남에 요
시찰인으로 지목되고 친지까지 감시가 심하니 부득히 포항으로 이주 삼가 3.1운동 주모자 임봉구 동지와 삼산당 약국을 경영하면서 수차 상해임정에 자금을 송금하면서 후일을 도모하던 중 옥고의 여독과 총상의 재발로 조국광복을 5개월 앞둔 서기 1945년 3월 5일 향년 67세로 졸하였으며 함양 백전면 매취재에 안장하였다가 그 후 국립묘지에 이장하였다. 1남 2녀를 입양하니 남에 영수요 서 이병길 하구종이다. 기후 국가에서 1986년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고 권대장의 애국충정을 높이 찬양하여 함양군민이 뜻을 모아 함양 숲에 1991년 동상을 세웠으며 용약의병불요불굴 친필이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니 고향에는 행적을 전하지 못해 고심 중 종족의 합의에 의거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 권동술 위원장을 중심으로 하여 고향마을 쌍암정하에 정부지원과 후손 영오 오철 해출 오성 오덕 현석 해호 해철 인오 두현 등 협찬으로 공적비를 수립하노니 후손들은 조선의 덕행과 애국충절을 계승하여 영원무궁 전하고자 함이다.
독립투사 12대장 권석도 공적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3-1-46 / 관리자 : 문중대표
이 공적비는 권석도(權錫燾: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 의병장의 전적을 기려 2004년 7월 31일 건립하였다.
권석도 의병장은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자 크게 분노하여 김동신(金東臣) 의병진에 참가하였다가 고광순(高光洵) 의병진과 합류하였다. 1907년 10월 11일 고광순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이끌고 계속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박인환(朴仁煥) 의병진과 합류하였으며, 박인환 등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1908년에는 하동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동년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피체되었다. 하동주재소에 구금 중 그는 1908년 7월 9일 탈주에 성공하여 도피하다가 일경의 추격을 받아 흉부에 총상을 입기도 하였다.
1909년 3월 그는 다시 이학로(李學魯) 의병장과 합세하여 신주 서면 동양곡(東陽谷)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던 중 1909년 10월 10일 진주에서 다시 일경에 피체되어 6년 9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가출옥하였다. 또다시 1918년 2월 일경으로부터 다시 강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10여 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 당시 일경의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회복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일경의 소위 요시찰인 감시가 극심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포항·울진 등 낯선 고장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권석도 의병장 출신지인 경남 함양에는 권석도 의병장 동상과 흉상이 있다.
獨立鬪士 十二大將 權錫燾 功績碑(독립투사 12대장 권석도 공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