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20-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龍城祖師 行蹟碑(용성조사 행적비)
傳佛心燈 譯經弘闡 救國護法 龍城祖師 行蹟碑銘 幷序
전불심등 역경홍천 구국호법 용성조사 행적비명 병서
一千七百年의 韓國 佛敎史를 살펴보건데 三國을 비롯하여 高麗와 朝鮮朝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高僧大德이 出世하여 韓國佛敎의 中興과 國民精神 啓導에 赫赫한 業蹟을 남겼음은 두루 아는 事實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舊韓末 禪敎律에 精通하였을 뿐만 아니라 文殊의 智座에서 분연히 일어나 普賢의 紫陌으로부터 途中事를 시작하여 佛敎의 大衆化와 國民啓導 및 抗日 獨立運動의 旗幟를 높이 들고 大獅子吼를 외쳤던 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己未年 三·一 獨立運動 때 民族代表 三十三人中 佛敎代表였던 龍城祖師이시다. 祖師는 曹溪直下 第三十五代 法孫인 喚惺志安禪師(환성지안선사)의 후예(錦溪元宇 靑波慧苑 百忍泰榮 翫眞大安 枕虛處華 草愚永瑄 南湖幸準 等 七師를 뛰어 넘어 二百餘年을 소급하여 喚惺志安禪師를 遠嗣하였다.)로써 俗性은 白氏 本貫은 水原 俗名은 相奎 法名은 震鍾이며 龍城은 法號이다. 스님은 一八六四年 五月 八日 全羅北道 南原郡 下磻岩面 竹林里(現在의 全羅北道 長水郡 磻岩面 竹林里 二五二 番地)에서 아버지 白南賢公과 어머니 密陽孫氏의 長男으로 誕生하였다. 孫氏夫人이 어느날 밤 한 스님이 金爛袈裟(금란가사)를 입고 房에 들어오는 胎夢을 꾸고 孕胎하여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부터 寡默하였으며 葷肉이 섞인 飮食은 一切를 먹지 아니하였다. 淸高의 氣質과 溫恤의 情이 남달라 六歲 때 아버지가 낚은 물고기 중 살아있는 것은 許諾없이 모두 놓아주어 아버지가 크게 꾸짖으니 죽어가는 生命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울면서 대답하였다. 또 머슴의 동생이 怪疾에 걸려 草幕에 放置된 채 飢餓와 病苦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父母 모르게 糧食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으니 이때 이미 度生의 알을 품은 資質을 감추지 못하였고 九歲 때 全州 合竹扇을 詩題로 내건 鄕塾의 白日場에서 大橈合竹扇하니 借來洞庭風이라 作詩하고 봄날 村童들이 진달래꽃 따는 것을 보고 摘花手裏動春心이라고 卽興詩를 읊어 文才의 뛰어남이 遠近에 알려져 그 英特함에 稱頌이 자자하였다. 少年期에 접어 들자 儒書 못지 않게 佛書를 가까이 하였으며 十四歲 때 佛經을 보다가 크게 느낀 바 있어 父母 모르게 南原郡 蛟龍山城의 德密庵에서 行者生活을 하였으나 父母의 挽留에 依해 還家하게 되었다. 스님은 그 뒤에도 世俗에 뜻이 전혀 없어 一八七九年 다시 出家할 뜻을 굳히고 父母의 간곡한 挽留를 뿌리치고 慶尙南道 陜川郡 伽倻山 海印寺 極樂殿을 찾아가 華月和尙을 恩師로 相虛慧造律師를 戒師로 하여 沙彌戒를 받았다. 곧이어 義城 孤雲寺 水月永旻和尙을 親見하고 無常이 迅速하니 어떻게 하여야 見生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去聖時遙에 魔强法弱하며 宿業障重하여 善弱難排이니 誠禮三寶하며 勤誦大悲神呪하면 自然業障消滅하고 心光透漏하리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大悲呪와 六字呪를 九個月 동안 持誦하다가 楊州 普光寺 兜率庵에서 森羅萬像은 모두 그 根源이 있거늘 人間의 根本은 무엇인가라는 疑團으로 精進하다가 六日만에 忽然히 깨달으니 五蘊山中尋牛客이 獨坐虛堂一輪孤로다 方圓長短誰是道오 一團火炎燒大千이라는 偈頌을 읊었다.
一八八三年 金剛山 表訓寺 無融禪師를 參訪하여 無字話頭를 決擇받고 다시 普光寺 兜率庵으로 돌아와 勇猛精進하다가 排雲携霧尋文殊타가 始到文殊廓然空이로다 色色空空還復空하니 空空色色重無盡이라는 歌頌을 읊었다. 一八八四年 三月 梁山郡 通度寺 金剛戒壇에서 禪谷律師로부터 比丘戒와 菩薩戒를 受持하니 이는 一八二八年 大隱朗旿律師가 그의 스승인 金潭長老와 함께 智異山 雙溪寺 七佛庵에서 七日間 祈禱끝에 瑞祥受戒한 大隱律師의 戒脈이다. 그해 冬安居는 智異山 金剛臺에서 지냈고 一八八五年부터 順天 松廣寺 三日庵에서 精進하면서 틈틈이 景德傳燈錄을 보다가 金輪可觀禪師의 法語인 月似灣弓하니 小雨多風이라는 句節에 이르러 割然大悟하여 一面佛月面佛話와 無字話頭까지도 渙然明白하였다. 다시 海印寺로 돌아와 精進하다가 伽倻名價高靑丘 明心道師幾往來 矗矗奇岩疊鱗高 密密栢樹相連靑 無限白雲滿洞鎖 洪鍾轟轟碧空衝 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眼日己敍라는 敍景詩를 읊어 自然과 日常이 融合된 境界를 보였다. 一八八六年에 다시 松廣寺 三日庵으로 옮겨 夏安居를 마치고 嶺南으로 돌아오던 중 洛東江을 건너면서 金烏千秋月이요 洛東萬里波로다 漁舟何處去오 依舊宿蘆花라는 悟道頌을 읊었다. 스님은 이와 같이 敎를 거치지 아니하고 直接 禪으로 들어가 悟道한 然後 敎學을 남김없이 涉獵하는 禪敎兼修의 길을 主唱하였다. 悟道後 順天 松廣寺 甘露庵 湖鵬講伯에게서 起信論과 法華經을 受講하고 禪客 三十三人과 함께 智異山 上禪庵에서 한해 여름을 지낸 다음 谷城 泰安寺 水鯨講伯으로부터 禪要와 書狀을 讀破하였으며 이어 上無住庵에서 冬安居를 解制하고 聞慶 淸華山 圓寂庵 石橋律師에게서 梵網經과 四分律을 聽受하면서 夏安居를 解制하고 다시 松廣寺 湖鵬講下에서 華嚴經을 受講하였으며 海印寺의 月華講伯으로부터는 禪門拈頌을 月華講伯이 聞慶 大乘寺로 移錫하므로 講伯을 따라가 華嚴十地品과 緇門警訓을 閱覽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스님은 緇門警訓을 閱覽하던 중 靈雲志勤禪師의 法語인 驢事未去에 馬事到來의 意旨는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에 長安大道亂如絲하니 人去人來終不休라고 對答했다. 또 護明禪師가 明明百草頭에 明明祖師意라 하니 和尙의 見解는 어떠한가라는 質問에 四佛山中에 花紅柳綠하니 禪師가 任意로 遊覽하시구려 하였다. 그 후 金溝郡(現在 金堤郡 金溝面) 龍眼臺의 道植禪師를 參訪 直下에 臨濟老漢을 보았는가? 그때 스님이 大聲一喝하니 禪師가 一棒을 내리치고 拍掌大笑하였다. 二十三歲 때 見性悟道하고 三十歲까지에는 修禪과 經論 語錄 等을 두루 閱覽하였다. 그후 七夏 동안 晦跡韜名하여 保任專注하였다. 一九◯◯年 가을 洪城 天藏庵을 거쳐 定慧寺에 이르러 慧月禪師와 格外宗旨를 擧揚하고 松廣寺 曹溪峰 土窟에서 冬安居 一九◯一年 二月 海印寺 修禪社에서 霽山禪師와 西來密旨를 擧揚하였으며 星州 修道庵에서 冬安居를 지냈다. 一九◯二年 智異山 華嚴寺 塔殿에서 夏安居 中 찾아온 滿空禪師에게 遠路에 路毒이 어떠하며 侍者는 몇 사람인가 하고 물음에 禪師는 侍者도 없고 또한 路毒도 없다는 知彼知己의 法談을 나누었으며 冬安居를 順天 仙岩寺 七佛殿에서 지내고 이듬해 봄 妙香山 上毘盧庵에 修禪會를 創設하였고 金剛山 佛地庵서 冬安居 一九◯四年 二月 鐵原 寶盖山 聖住庵에 修禪會를 開設하였으며 一九◯五年 寶盖山에 觀音殿을 創建하여 住錫하면서 禪門要旨一卷을 著述하였고 그해 가을 三角山 望月寺로 移錫하였다. 이무렵 海印寺 所藏 國寶 高麗八萬大藏經板이 歲久年深하여 大部分의 經板이 板角의 鐵裝飾이
전불심등 역경홍천 구국호법 용성조사 행적비명 병서
一千七百年의 韓國 佛敎史를 살펴보건데 三國을 비롯하여 高麗와 朝鮮朝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高僧大德이 出世하여 韓國佛敎의 中興과 國民精神 啓導에 赫赫한 業蹟을 남겼음은 두루 아는 事實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舊韓末 禪敎律에 精通하였을 뿐만 아니라 文殊의 智座에서 분연히 일어나 普賢의 紫陌으로부터 途中事를 시작하여 佛敎의 大衆化와 國民啓導 및 抗日 獨立運動의 旗幟를 높이 들고 大獅子吼를 외쳤던 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己未年 三·一 獨立運動 때 民族代表 三十三人中 佛敎代表였던 龍城祖師이시다. 祖師는 曹溪直下 第三十五代 法孫인 喚惺志安禪師(환성지안선사)의 후예(錦溪元宇 靑波慧苑 百忍泰榮 翫眞大安 枕虛處華 草愚永瑄 南湖幸準 等 七師를 뛰어 넘어 二百餘年을 소급하여 喚惺志安禪師를 遠嗣하였다.)로써 俗性은 白氏 本貫은 水原 俗名은 相奎 法名은 震鍾이며 龍城은 法號이다. 스님은 一八六四年 五月 八日 全羅北道 南原郡 下磻岩面 竹林里(現在의 全羅北道 長水郡 磻岩面 竹林里 二五二 番地)에서 아버지 白南賢公과 어머니 密陽孫氏의 長男으로 誕生하였다. 孫氏夫人이 어느날 밤 한 스님이 金爛袈裟(금란가사)를 입고 房에 들어오는 胎夢을 꾸고 孕胎하여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부터 寡默하였으며 葷肉이 섞인 飮食은 一切를 먹지 아니하였다. 淸高의 氣質과 溫恤의 情이 남달라 六歲 때 아버지가 낚은 물고기 중 살아있는 것은 許諾없이 모두 놓아주어 아버지가 크게 꾸짖으니 죽어가는 生命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울면서 대답하였다. 또 머슴의 동생이 怪疾에 걸려 草幕에 放置된 채 飢餓와 病苦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父母 모르게 糧食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으니 이때 이미 度生의 알을 품은 資質을 감추지 못하였고 九歲 때 全州 合竹扇을 詩題로 내건 鄕塾의 白日場에서 大橈合竹扇하니 借來洞庭風이라 作詩하고 봄날 村童들이 진달래꽃 따는 것을 보고 摘花手裏動春心이라고 卽興詩를 읊어 文才의 뛰어남이 遠近에 알려져 그 英特함에 稱頌이 자자하였다. 少年期에 접어 들자 儒書 못지 않게 佛書를 가까이 하였으며 十四歲 때 佛經을 보다가 크게 느낀 바 있어 父母 모르게 南原郡 蛟龍山城의 德密庵에서 行者生活을 하였으나 父母의 挽留에 依해 還家하게 되었다. 스님은 그 뒤에도 世俗에 뜻이 전혀 없어 一八七九年 다시 出家할 뜻을 굳히고 父母의 간곡한 挽留를 뿌리치고 慶尙南道 陜川郡 伽倻山 海印寺 極樂殿을 찾아가 華月和尙을 恩師로 相虛慧造律師를 戒師로 하여 沙彌戒를 받았다. 곧이어 義城 孤雲寺 水月永旻和尙을 親見하고 無常이 迅速하니 어떻게 하여야 見生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去聖時遙에 魔强法弱하며 宿業障重하여 善弱難排이니 誠禮三寶하며 勤誦大悲神呪하면 自然業障消滅하고 心光透漏하리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大悲呪와 六字呪를 九個月 동안 持誦하다가 楊州 普光寺 兜率庵에서 森羅萬像은 모두 그 根源이 있거늘 人間의 根本은 무엇인가라는 疑團으로 精進하다가 六日만에 忽然히 깨달으니 五蘊山中尋牛客이 獨坐虛堂一輪孤로다 方圓長短誰是道오 一團火炎燒大千이라는 偈頌을 읊었다.
一八八三年 金剛山 表訓寺 無融禪師를 參訪하여 無字話頭를 決擇받고 다시 普光寺 兜率庵으로 돌아와 勇猛精進하다가 排雲携霧尋文殊타가 始到文殊廓然空이로다 色色空空還復空하니 空空色色重無盡이라는 歌頌을 읊었다. 一八八四年 三月 梁山郡 通度寺 金剛戒壇에서 禪谷律師로부터 比丘戒와 菩薩戒를 受持하니 이는 一八二八年 大隱朗旿律師가 그의 스승인 金潭長老와 함께 智異山 雙溪寺 七佛庵에서 七日間 祈禱끝에 瑞祥受戒한 大隱律師의 戒脈이다. 그해 冬安居는 智異山 金剛臺에서 지냈고 一八八五年부터 順天 松廣寺 三日庵에서 精進하면서 틈틈이 景德傳燈錄을 보다가 金輪可觀禪師의 法語인 月似灣弓하니 小雨多風이라는 句節에 이르러 割然大悟하여 一面佛月面佛話와 無字話頭까지도 渙然明白하였다. 다시 海印寺로 돌아와 精進하다가 伽倻名價高靑丘 明心道師幾往來 矗矗奇岩疊鱗高 密密栢樹相連靑 無限白雲滿洞鎖 洪鍾轟轟碧空衝 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眼日己敍라는 敍景詩를 읊어 自然과 日常이 融合된 境界를 보였다. 一八八六年에 다시 松廣寺 三日庵으로 옮겨 夏安居를 마치고 嶺南으로 돌아오던 중 洛東江을 건너면서 金烏千秋月이요 洛東萬里波로다 漁舟何處去오 依舊宿蘆花라는 悟道頌을 읊었다. 스님은 이와 같이 敎를 거치지 아니하고 直接 禪으로 들어가 悟道한 然後 敎學을 남김없이 涉獵하는 禪敎兼修의 길을 主唱하였다. 悟道後 順天 松廣寺 甘露庵 湖鵬講伯에게서 起信論과 法華經을 受講하고 禪客 三十三人과 함께 智異山 上禪庵에서 한해 여름을 지낸 다음 谷城 泰安寺 水鯨講伯으로부터 禪要와 書狀을 讀破하였으며 이어 上無住庵에서 冬安居를 解制하고 聞慶 淸華山 圓寂庵 石橋律師에게서 梵網經과 四分律을 聽受하면서 夏安居를 解制하고 다시 松廣寺 湖鵬講下에서 華嚴經을 受講하였으며 海印寺의 月華講伯으로부터는 禪門拈頌을 月華講伯이 聞慶 大乘寺로 移錫하므로 講伯을 따라가 華嚴十地品과 緇門警訓을 閱覽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스님은 緇門警訓을 閱覽하던 중 靈雲志勤禪師의 法語인 驢事未去에 馬事到來의 意旨는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에 長安大道亂如絲하니 人去人來終不休라고 對答했다. 또 護明禪師가 明明百草頭에 明明祖師意라 하니 和尙의 見解는 어떠한가라는 質問에 四佛山中에 花紅柳綠하니 禪師가 任意로 遊覽하시구려 하였다. 그 후 金溝郡(現在 金堤郡 金溝面) 龍眼臺의 道植禪師를 參訪 直下에 臨濟老漢을 보았는가? 그때 스님이 大聲一喝하니 禪師가 一棒을 내리치고 拍掌大笑하였다. 二十三歲 때 見性悟道하고 三十歲까지에는 修禪과 經論 語錄 等을 두루 閱覽하였다. 그후 七夏 동안 晦跡韜名하여 保任專注하였다. 一九◯◯年 가을 洪城 天藏庵을 거쳐 定慧寺에 이르러 慧月禪師와 格外宗旨를 擧揚하고 松廣寺 曹溪峰 土窟에서 冬安居 一九◯一年 二月 海印寺 修禪社에서 霽山禪師와 西來密旨를 擧揚하였으며 星州 修道庵에서 冬安居를 지냈다. 一九◯二年 智異山 華嚴寺 塔殿에서 夏安居 中 찾아온 滿空禪師에게 遠路에 路毒이 어떠하며 侍者는 몇 사람인가 하고 물음에 禪師는 侍者도 없고 또한 路毒도 없다는 知彼知己의 法談을 나누었으며 冬安居를 順天 仙岩寺 七佛殿에서 지내고 이듬해 봄 妙香山 上毘盧庵에 修禪會를 創設하였고 金剛山 佛地庵서 冬安居 一九◯四年 二月 鐵原 寶盖山 聖住庵에 修禪會를 開設하였으며 一九◯五年 寶盖山에 觀音殿을 創建하여 住錫하면서 禪門要旨一卷을 著述하였고 그해 가을 三角山 望月寺로 移錫하였다. 이무렵 海印寺 所藏 國寶 高麗八萬大藏經板이 歲久年深하여 大部分의 經板이 板角의 鐵裝飾이
差脫하고 많은 字劃이 磨滅한 것을 본 스님은 經板補修佛事의 願을 세우고 있던 次 마침내 一九◯六年 一月 望月寺로 스님을 親見하려 온 林尙宮에게 貴重한 聖寶修板佛事를 付託하여 林尙宮의 周旋으로 二萬兩의 內帑金이 令達되었고 王은 佛事의 圓滿한 成就를 위해 擔當官 林某氏와 姜大蓮和尙을 파견하였으며 別官은 金聖業을 寺中에서 任命한 現場監督은 景明과 泳海 두 스님이었다. 그해 九月 德裕山 護國寺에서 修禪社를 열어 衲子를 提接 一九◯七年 三月 山內舊基에 禪院을 創建하고 法泉庵이라 이름하였다. 九月에는 中國에 건너가 北京 觀音寺에서 冬安居를 마치고 一九◯八年 二月 通州 華嚴寺에 當到하니 그곳 어느 스님이 受戒寺를 물음에 梁山 通度寺라고 對答하니 그는 말하기를 吾國의 戒脈이 언제 朝鮮에 傳해졌는가 듣건데 朝鮮에는 沙彌戒만 받아 僧伽가 되고 比丘戒는 授受하는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事實인가 함에 스님은 正色하고 言聲을 높여 空中의 日月이 어찌 汝國의 것인가 佛法은 天下의 公道이거늘 어찌 中國의 專有物로만 생각하는가 비록 나라는 大國이나 사람들은 小人이라고 詰責하였다. 그해 二月 서울로 돌아왔다. 一九◯九年 三月부터 海印寺 願堂庵에 彌陀會를 創設하여 禪淨一致를 唱導하였으며 그해 四月 十五日 結制 때 海印寺 大寂光殿에서 法床에 올라 良久하고 柱杖子를 一下한 다음 告衆曰 山僧이 不啻根鈍知淺이라 近日에 事煩하여 佛法에 頓無情況이어니 敎我說什 麽法고 我有眼如盲하고 有耳如聾하면 有鼻如塞하고 有口如啞하며 有身如枯木하고 有意如寒灰하나니 敎我說什麽法고 設余 眼不盲 耳不聾 鼻不塞 口不啞 身不枯木 意不寒灰인들 敎我說什麽法고 道道하라 余仰 不得己하여 說少許法하여 通箇消息하리라 楞嚴經云하되 決擇眞妄하여 以爲密因이라 하시니 諸人은 作麽生會오 學道人이 若馳求心과 知見情量心이 不歇하면 是爲邪見이요 不名學也니라 昔에 世尊이 在 靈山會上 坐 獅子座하사 百萬大衆이 圍繞러니 世尊이 忽無去處어늘 人天 百萬億 菩薩大衆이 各 以天眼으로 觀察十方하되 罔知 世尊 去處러라 彌勒이 觀察四衆하며 亦自決疑하여 問 文殊한데 文殊가 引古決疑하시니 此事는 非天眼으로 所可知也니라 擧如此等話四五則然後에 拈起柱杖하고 良久云 人人箇箇立千仞이라 到這裏하여 討箇甚麽오 士人은 讀詩書學禮義하고 農人은 日出而作 日入而息하여 鑿井而飮하고 耕田而食하며 工人은 出自家兩隻手하여 巧作千般奇物하고 商人은 行商也行商하고 坐商也坐商하나니 敎我說什麽法고 會麽아 不塗紅粉也風流니라 然이나 從上諸聖이 因五道歷四生이 爲此事也시며 畢竟悟得底도 亦悟此事也며 今日大衆이 同會道場도 亦爲此事也니라
會麽아 添脂着粉也無妨이니라 良久라가 擧起柱杖하고 拈放背後云會麽아 良久云 伽倻巍巍兮여 白雲片片이요 麥穗重重兮여 鶯歌滑滑이로다. 綠樹風淸兮여 芳草煙生이라하고 良久한 다음 吟古頌云 鐵牛對對黃金角 木馬雙雙白玉蹄 爲愛雪山香草細 夜深乘月過前溪 玉麟帶日離霄漢 金鳳含花下彩樓 野老不嫌公子醉 相將携手御街遊라 하였다.一九一◯年 河東 七佛禪院 祖室로 있으면서 大衆의 懇請으로 歸源正宗을 著述하였으니 이는 排佛政策으로 佛敎를 彈壓해온 儒敎와 西歐列强의 西勢東漸하는 물결을 타고 繁昌하는 西敎에 對한 近世 最初의 敎理的 闡明이었다. 이듬해 二月 上京하여 都城 內에 西敎의 敎會는 廣大嚴麗하고 尖塔이 높이 솟아 日曜禮拜時에 聽衆이 滿堂할 뿐 아니라 鍾聲 또한 錚錚하건만 佛敎의 寺院은 寂寞 無人함을 보고 이것이 누구의 責任인가 하고 痛歎한 스님은 入泥入水하며 入廛垂手하는 途中事를 決心하고 康永勻居士의 집에서 禪會를 열어 禪布敎의 旗幟를 들었으니 이것이 一般大衆을 向한 都市 禪布敎의 嚆矢이다. 이어 스님은 서울 鐘路區 鳳翼洞에 大覺寺를 세우고 一九一二年에는 大寺洞에 朝鮮佛敎 臨濟宗 中央敎堂을 세워 大衆布敎를 始作한 지 三年만에 三千餘 民衆이 雲集하였고 一九一三年 南泉, 惺月, 道峰, 石頭和尙 等 넷 스님의 發起로 禪學院을 세우게 된 것도 스님의 禪布敎에 影響을 받은 것이다. 大都市마다 禪布敎堂을 建立하고자 資金을 마련하기 爲해 一九一六年부터 北靑에서 金鑛을 運營하였으나 失敗하여 스님의 計劃은 霧散되었다. 그러나 傳統佛敎의 眞面目을 宣揚하는 大衆布敎를 通해 亡國民의 民族意識을 일깨워 祖國光復의 힘을 키우고자 한 스님의 뜻은 一九一九年 三月 一日의 己未獨立宣言으로 이어져 三十三人의 民族代表中 韓龍雲禪師와 함께 佛敎界의 代表로 參與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倭警에 체포되어서는 그들의 奸巧한 懷柔를 뿌리치고 마침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여 西大門 監獄에서 一年六個月間의 獄苦를 치루었다. 또한 北靑에서의 金鑛 事業과 延吉의 農場 運營은 內心으로는 獨立鬪士들에 對한 資金支援과 情報提供을 爲함이었다. 이러한 功勞로 一九六二年 政府로부터 國家功勞賞을 一九九◯年에는 國家로부터 錦冠文化勳章과 文化部로부터 한글저술과 譯經功勞로 感謝牌를 追贈 받았다. 스님은 出獄한 뒤에도 이 民族의 覺醒을 위하고 새로운 時代에 적응하는 佛敎의 理想的인 進路를 개척하고 民族文化의 根幹을 이루고 있는 韓國傳統 佛敎의 日本化 政策에 對抗하여 一九二一年에는 五十八歲의 白髮老衰와 目眩神昧에도 不拘하고 佛敎의 一大革新의 母體로
會麽아 添脂着粉也無妨이니라 良久라가 擧起柱杖하고 拈放背後云會麽아 良久云 伽倻巍巍兮여 白雲片片이요 麥穗重重兮여 鶯歌滑滑이로다. 綠樹風淸兮여 芳草煙生이라하고 良久한 다음 吟古頌云 鐵牛對對黃金角 木馬雙雙白玉蹄 爲愛雪山香草細 夜深乘月過前溪 玉麟帶日離霄漢 金鳳含花下彩樓 野老不嫌公子醉 相將携手御街遊라 하였다.一九一◯年 河東 七佛禪院 祖室로 있으면서 大衆의 懇請으로 歸源正宗을 著述하였으니 이는 排佛政策으로 佛敎를 彈壓해온 儒敎와 西歐列强의 西勢東漸하는 물결을 타고 繁昌하는 西敎에 對한 近世 最初의 敎理的 闡明이었다. 이듬해 二月 上京하여 都城 內에 西敎의 敎會는 廣大嚴麗하고 尖塔이 높이 솟아 日曜禮拜時에 聽衆이 滿堂할 뿐 아니라 鍾聲 또한 錚錚하건만 佛敎의 寺院은 寂寞 無人함을 보고 이것이 누구의 責任인가 하고 痛歎한 스님은 入泥入水하며 入廛垂手하는 途中事를 決心하고 康永勻居士의 집에서 禪會를 열어 禪布敎의 旗幟를 들었으니 이것이 一般大衆을 向한 都市 禪布敎의 嚆矢이다. 이어 스님은 서울 鐘路區 鳳翼洞에 大覺寺를 세우고 一九一二年에는 大寺洞에 朝鮮佛敎 臨濟宗 中央敎堂을 세워 大衆布敎를 始作한 지 三年만에 三千餘 民衆이 雲集하였고 一九一三年 南泉, 惺月, 道峰, 石頭和尙 等 넷 스님의 發起로 禪學院을 세우게 된 것도 스님의 禪布敎에 影響을 받은 것이다. 大都市마다 禪布敎堂을 建立하고자 資金을 마련하기 爲해 一九一六年부터 北靑에서 金鑛을 運營하였으나 失敗하여 스님의 計劃은 霧散되었다. 그러나 傳統佛敎의 眞面目을 宣揚하는 大衆布敎를 通해 亡國民의 民族意識을 일깨워 祖國光復의 힘을 키우고자 한 스님의 뜻은 一九一九年 三月 一日의 己未獨立宣言으로 이어져 三十三人의 民族代表中 韓龍雲禪師와 함께 佛敎界의 代表로 參與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倭警에 체포되어서는 그들의 奸巧한 懷柔를 뿌리치고 마침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여 西大門 監獄에서 一年六個月間의 獄苦를 치루었다. 또한 北靑에서의 金鑛 事業과 延吉의 農場 運營은 內心으로는 獨立鬪士들에 對한 資金支援과 情報提供을 爲함이었다. 이러한 功勞로 一九六二年 政府로부터 國家功勞賞을 一九九◯年에는 國家로부터 錦冠文化勳章과 文化部로부터 한글저술과 譯經功勞로 感謝牌를 追贈 받았다. 스님은 出獄한 뒤에도 이 民族의 覺醒을 위하고 새로운 時代에 적응하는 佛敎의 理想的인 進路를 개척하고 民族文化의 根幹을 이루고 있는 韓國傳統 佛敎의 日本化 政策에 對抗하여 一九二一年에는 五十八歲의 白髮老衰와 目眩神昧에도 不拘하고 佛敎의 一大革新의 母體로
大覺敎를 創立하는 한편 三藏譯會를 만들어 經典의 우리말 飜譯에 專念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려는 日帝의 馬脚을 豫見하였기 때문이다. 스님의 著述로는 禪門要旨, 歸源正宗을 비롯하여 心造萬有論, 修心正路, 팔상록, 大覺敎儀式, 大覺敎歌集, 불문입교문답, 覺海日輪, 晴空圓日, 修心論, 釋迦史, 極樂路程記, 佛敎唱歌, 大覺源流, 敎理大典, 大覺敎兒童敎科書, 臨終訣, 梵網經演義, 吾道의 眞理, 吾道는 覺, 龍城禪師語錄 等이고, 譯書로는 신역대장경, 首楞嚴經鮮漢演義, 卍金毘羅經, 覺頂心觀音正士摠持經, 大方廣圓覺經, 詳譯科解金剛經, 八陽經, 조선글화엄경, 朝鮮語楞嚴經, 六祖壇經, 大乘起信論, 灌頂伏魔經, 覺說梵網經, 鮮漢譯大方廣佛華嚴經, 六字靈感大明王經, 千手經, 지장보살본원경, 鮮漢文譯禪門撮要, 金剛三昧經, 六字大明王經, 川老金剛經 等이며, 論說로는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 活句參禪萬日結社發願文, 日本式犯戒生活에 대한 建白書, 中央行政에 대한 希望, 禪話漏說 等이고 雜誌로는 佛日과 無我 等을 發刊하였다. 한편 스님은 持戒에 있어서도 嚴正하였으니 그 持戒思想의 根源은 百丈의 淸規에 있고 實踐은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을 이어 받아 禪農一致를 主唱하였다. 一九二二年 亡命地인 延吉市 明月村과 鳳寧村 一帶에 田地 七十餘晌을 買入하여 大覺敎堂을 設立, 禪農一致의 修行을 몸소 본 보였다. 그러나 總督府의 諜者로 投入된 서울 鐘路區 天一堂 漢藥房 從事員인 安某는 計劃的으로 스님의 上佐가 되어 두터운 信任을 얻은 다음 農場을 經營한 지 三年만에 賣却 逃走하여 스님의 뜻은 挫折되고 말았다. 그러나 스님은 一九二七年 慶南 咸陽郡 栢田面 白雲理 白雪山에 三十餘町步를 確保하여 華果院을 設立하고 果樹 一萬餘 株를 심고 다시 禪農佛敎를 일으켜 韓國禪修行의 새로운 局面을 열었으니 日帝植民治下의 劣惡한 寺院經濟를 극복하며 나아가서 民族이 經濟力을 向上시키므로써 나라를 回復하는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亡命地로부터 돌아온 直後인 一九二四年 四月 二十八日 大覺寺에서 看經次 左齒間으로부터 五色이 玲瓏한 舍利 一顆가 出現하여 三次에 걸쳐 放光하였다. 一九二五年 三角山 望月寺에서 活句參禪 萬日結社를 創設하고 날로 쇠퇴해 가는 以戒爲師의 律風振作을 위하여 佛工인 韓鳳憐에게 玉石으로 觀音 및 地藏菩薩像과 戒牒板, 法王之寶, 千華律脈戒師之印, 防僞之印 等을 새기게 하고 觀音 및 地藏菩薩像 前에서 萬日祈禱를 奉行하면서 禪律一致를 提唱하고 그해 十月 十五日 海印寺 金剛戒壇에서 如法한 授戒法會를 開設하였으니 이후 스님으로부터 禪法과 戒法을 받은 제자가 무려 數萬에 이르렀으니 末世之正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特히 우리 固有의 傳統 文化를 抹殺하고자 하는 日帝 植民政策의 一環으로 韓國佛敎의 傳統과 思想을 日本佛敎化하고자 僧伽의 帶妻食肉과 飮酒率家를 暗暗裏에 助長하는 朝鮮總督府와 日本內務省에 맞서 一九二六年 五月과 九月에 各各 建白書를 내어 佛敎의 根本精神에 立脚한 韓國佛敎의 傳統을 지키고자 努力하였으나 日帝에 의하여 이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斷念하지 아니하고 平生을 通하여 期會가 있을 때마다 帶妻率家와 飮酒食肉을 비롯한 온갖 犯戒의 잘못을 指摘하고 退色變質되어가는 韓國佛敎의 一大覺醒을 促求하였다. 스님은 平素敎育을 通하여 겨레가 깨우치지 못하면 佛敎의 中興도 祖國의 光復도 至難하다는 信念을 가지고 一九二八年에는 大覺日曜學校를 一九二九年에는 大覺敎堂에 修禪會를 開設하여 民衆敎育에 힘썼으나 一九三四年 日帝는 大覺敎의 活動을 彈壓하여 一九三六年에는 不得已 大本山 梵魚寺 京城布敎堂으로 改稱하였으나 一九三八年 大覺敎 創設 十八年만에 이를 解散시키므로써 스님의 活動은 事實上 봉쇄당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이에 屈伏하지 않고 一九三九年 朝鮮佛敎 禪宗叢林으로 改編하여 活動을 再開하였으나 無常迅速하고 時不待人하여 마침내 一九四◯年 二月 二十四日 서울 大覺寺에서 門徒들에게 涅槃을 豫言하시고 沐浴한 다음 架裟를 입고 端正히 앉아 入寂하니 世壽는 七十七歲요 法臘은 六十一歲였다. 臨終에 앞서 스님은 내가 오늘 涅槃에 들고자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거나 孝道를 行하려 하지 말고 오직 無上大涅槃이 圓明常寂照라는 法句만을 외우라고 遺敎하였다. 이때 弟子가 묻되 스님은 어느곳으로 向하여 가시렵니까 하니 匏花穿籬出하여 閒臥麻田上이라는 臨終偈를 남겼다. 一九四一年 海印寺 西麓 弘濟庵 東便에 韓龍雲禪師가 지은 祖師의 舍利塔碑를 세움과 同時에 塔廟를 侍護할 龍塔殿도 함께 建立하였다. 그러나 그 當時는 日帝治下였기에 스님의 生涯를 赤裸裸하게 摘記하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 하던 次 門徒와 스님의 遺志를 받들어 一九六九年에 設立된 財團法人 大覺會의 理事長이며 스님의 마지막 生存한 受法弟子인 慈雲老師의 發願과 大覺寺住持 佛心道文 和尙과 立碑幹事인 無心普光師主의 心血을 기울인 努力과 모든 門徒들의 合力으로 새롭게 碑碣를 세우게 되었으니 實로 스님 가신 지 半世紀만의 佛事임에 어찌 기쁘지 않으랴!! 感泣하면서 敢히 祖師의 行狀을 撰하는 바이다. 以上 祖師의 偉業倬跡을 偈頌으로 讚揚하노라.
悠久한 韓國佛敎 千七百餘年 동안
數많은 高僧大德 民族의 횃불되어
龍城堂 大祖師도 宿世의 願行따라
實相山 기슭아래 童子로 應身했네
出衆한 學童生活 四書를 涉獵하고
竺敎에 뜻을두어 海印에 出家하여
三藏에 精通하고 密旨를 大悟한後
文賢의 智行으로 이江山 살펴봤네
白衣의 檀君子孫 日帝에 짓밟히고
뺴앗긴 祖國山河 곳마다 피멍인데
兄弟는 굶주리고 姉妹는 헐벗으니
이슬픔 이아픔을 그누가 알겠으랴
이民族 이겨레를 가슴에 쓸어안고
解放의 그날까지 이한몸 사루리라
한손에 삽을들고 한손에 藏經번역
徹夜를 지새우니 落淚가 江이된다
사무친 解放一念 佛菩薩 感應시켜
塔洞의 獨立宣言 民族의 代表되고
西大門 監獄속에 囹圄의 五百日이
光復의 氣運되어 祖國은 獨立됐네
世緣이 임박하니 門徒를 모아놓고
위없는 大涅槃은 둥글고 常寂하다
慧命을 당부하고 微笑로 坐脫하니
영롱한 五色舍利 人天의 福田이네
大祖師 願行속에 宗團은 바로서고
佛法의 深奧함을 누구나 쉬배워서
達磨의 五葉처럼 江山에 滿開하니
크신뜻 거룩함은 後學에 龜鑑되네
東山에 달이뜨니 西山에 해가지고
南山에 說法하니 北山은 點頭하네
寂光殿 毘盧遮那 華嚴을 常設하니
紅流洞 秋溪聲이 伽倻山 吐해낸다
佛紀二五三七年(一九九三) 五月 八日
門孫 伽山智冠 謹撰(문계 가산 지관 근서)
그러나 스님은 斷念하지 아니하고 平生을 通하여 期會가 있을 때마다 帶妻率家와 飮酒食肉을 비롯한 온갖 犯戒의 잘못을 指摘하고 退色變質되어가는 韓國佛敎의 一大覺醒을 促求하였다. 스님은 平素敎育을 通하여 겨레가 깨우치지 못하면 佛敎의 中興도 祖國의 光復도 至難하다는 信念을 가지고 一九二八年에는 大覺日曜學校를 一九二九年에는 大覺敎堂에 修禪會를 開設하여 民衆敎育에 힘썼으나 一九三四年 日帝는 大覺敎의 活動을 彈壓하여 一九三六年에는 不得已 大本山 梵魚寺 京城布敎堂으로 改稱하였으나 一九三八年 大覺敎 創設 十八年만에 이를 解散시키므로써 스님의 活動은 事實上 봉쇄당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이에 屈伏하지 않고 一九三九年 朝鮮佛敎 禪宗叢林으로 改編하여 活動을 再開하였으나 無常迅速하고 時不待人하여 마침내 一九四◯年 二月 二十四日 서울 大覺寺에서 門徒들에게 涅槃을 豫言하시고 沐浴한 다음 架裟를 입고 端正히 앉아 入寂하니 世壽는 七十七歲요 法臘은 六十一歲였다. 臨終에 앞서 스님은 내가 오늘 涅槃에 들고자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거나 孝道를 行하려 하지 말고 오직 無上大涅槃이 圓明常寂照라는 法句만을 외우라고 遺敎하였다. 이때 弟子가 묻되 스님은 어느곳으로 向하여 가시렵니까 하니 匏花穿籬出하여 閒臥麻田上이라는 臨終偈를 남겼다. 一九四一年 海印寺 西麓 弘濟庵 東便에 韓龍雲禪師가 지은 祖師의 舍利塔碑를 세움과 同時에 塔廟를 侍護할 龍塔殿도 함께 建立하였다. 그러나 그 當時는 日帝治下였기에 스님의 生涯를 赤裸裸하게 摘記하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 하던 次 門徒와 스님의 遺志를 받들어 一九六九年에 設立된 財團法人 大覺會의 理事長이며 스님의 마지막 生存한 受法弟子인 慈雲老師의 發願과 大覺寺住持 佛心道文 和尙과 立碑幹事인 無心普光師主의 心血을 기울인 努力과 모든 門徒들의 合力으로 새롭게 碑碣를 세우게 되었으니 實로 스님 가신 지 半世紀만의 佛事임에 어찌 기쁘지 않으랴!! 感泣하면서 敢히 祖師의 行狀을 撰하는 바이다. 以上 祖師의 偉業倬跡을 偈頌으로 讚揚하노라.
悠久한 韓國佛敎 千七百餘年 동안
數많은 高僧大德 民族의 횃불되어
龍城堂 大祖師도 宿世의 願行따라
實相山 기슭아래 童子로 應身했네
出衆한 學童生活 四書를 涉獵하고
竺敎에 뜻을두어 海印에 出家하여
三藏에 精通하고 密旨를 大悟한後
文賢의 智行으로 이江山 살펴봤네
白衣의 檀君子孫 日帝에 짓밟히고
뺴앗긴 祖國山河 곳마다 피멍인데
兄弟는 굶주리고 姉妹는 헐벗으니
이슬픔 이아픔을 그누가 알겠으랴
이民族 이겨레를 가슴에 쓸어안고
解放의 그날까지 이한몸 사루리라
한손에 삽을들고 한손에 藏經번역
徹夜를 지새우니 落淚가 江이된다
사무친 解放一念 佛菩薩 感應시켜
塔洞의 獨立宣言 民族의 代表되고
西大門 監獄속에 囹圄의 五百日이
光復의 氣運되어 祖國은 獨立됐네
世緣이 임박하니 門徒를 모아놓고
위없는 大涅槃은 둥글고 常寂하다
慧命을 당부하고 微笑로 坐脫하니
영롱한 五色舍利 人天의 福田이네
大祖師 願行속에 宗團은 바로서고
佛法의 深奧함을 누구나 쉬배워서
達磨의 五葉처럼 江山에 滿開하니
크신뜻 거룩함은 後學에 龜鑑되네
東山에 달이뜨니 西山에 해가지고
南山에 說法하니 北山은 點頭하네
寂光殿 毘盧遮那 華嚴을 常設하니
紅流洞 秋溪聲이 伽倻山 吐해낸다
佛紀二五三七年(一九九三) 五月 八日
門孫 伽山智冠 謹撰(문계 가산 지관 근서)
龍城祖翁
龍兮龍兮 造花莫測 呑吐乾坤 出沒自在
孔聖歎仰 誰敢復言 大吼寶塔 萬邦震動
詳譯金言 千古煇皝 鳳翼高座 花雨滿天
梵魚深藏 佛祖難窺 忽來忽去 夜半太陽
或住或行 蒼海明珠 一擧一投 少林虎嘯
一嚬一笑 曹溪獅躍
咦
輿此老有甚怨
柱杖從橫天地黑 億萬杖夫眼炯炯
曹溪宗正 不肖孫 退翁性徹 拜讚
비문 출처 : 백용성 대종사 총서 아카이브
龍兮龍兮 造花莫測 呑吐乾坤 出沒自在
孔聖歎仰 誰敢復言 大吼寶塔 萬邦震動
詳譯金言 千古煇皝 鳳翼高座 花雨滿天
梵魚深藏 佛祖難窺 忽來忽去 夜半太陽
或住或行 蒼海明珠 一擧一投 少林虎嘯
一嚬一笑 曹溪獅躍
咦
輿此老有甚怨
柱杖從橫天地黑 億萬杖夫眼炯炯
曹溪宗正 不肖孫 退翁性徹 拜讚
비문 출처 : 백용성 대종사 총서 아카이브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20-4 해인사 입구 휴게소와 박물관 사이에 있는 용성조사 행적비를 찾았다.
따로 안내판이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