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원 항일투쟁기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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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218
탐방로그
김덕원 항일투쟁기공비는 홍천기미만세공원 옆 마방터에 있다. 김덕원 선생은 마방터에서 동지를 규합하는 등, 이곳을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분이다. 기공기 주변에 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조형물이 여럿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자랑스러운 민족의 거목 김덕원 의사를 추모하며

숭고한 삼일자주독립 만세운동을 선도하시니 민족의 자긍심을 세계만방에 드높였다
위대한 민족의 자주정신을 삼일운동으로 승화하시니 한국인의 수월성을 세계인에게 전했다
고귀한 민족의 얼을 삼일자주독립운동으로 용트림하니 배달민족의 우월성도 세상에 빛냈다
청사에 길이 빛나는 삼일운동을 동창에서 봉기하시니 민족의 거봉 김덕원 의사 자랑스럽다
김덕원 의사의 우국충정 어린 구국운동을 회고하니 후학들은 머리숙여 경배를 올립니다

강원대학교 교수 기획연구실장 법학박사 김병학 삼가짓고
춘천 예사랑 서예원장 목천 김정복 삼가쓰다
김덕원 항일투쟁기공비는 홍천기미만세공원 옆 마방터에 있다. 김덕원 선생은 마방터에서 동지를 규합하는 등, 이곳을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金德元 義士 抗日鬪爭 紀功碑(김덕원 의사 항일투쟁 기공비)
金德元 義士 抗日鬪爭 紀功碑(김덕원 의사 항일투쟁 기공비)
김덕원 의사는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강요당할 때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도록 하늘이 내리신 분이다. 의사의 자는 덕원이요 휘는 원경이며 본관은 경주이시니 저 신라 대보 김알지의 61세손이시다. 신라말의 장군 김순웅은 중시조가 되고 조선조 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계림군 제숙공 김균은 파조이시다. 17대조이신 공호공 김종순이 한성부원군을 지내고 조선 6조(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청백리로 추앙받으니 이후 이 가계를 경파라고도 한다. 9대조이신 진사 김세신이 홍천으로 이거한 후 고조이신 김치집이 농경개척의 공이 지대했다. 그때 축조한 동창보변의 암벽에는 김군보 보라고 대형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강원도 농경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치집공은 관계치수의 성공으로 매득풍농에 일향을 ○안케 하니 지금도 그를 흠모하는 보제가 매년 끊기지 않고 있다. 의사께서 서기 1876년 11월 26일 용야위부사과 선략장군이신 김정준을 고로 하고 경주최씨를 비로하여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고고의 성을 울리니 그때는 일본의 강압에 의한 병자수호조약이 늑결되어 민족의 장래에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의사께서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엄하여 무관의 아들답다는 칭송을 들었고 지략이 탁월하여 사서를 능히 독파하였다. 일찍부터 계급의식이 없고 구휼정신이 남다르더니 19세 되던 해인 1894년에는 인내천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동학에 입도하여 그 해 동학군 최후의 격전장인 서석면 풍암리 전투에 참가하여 선봉을 맡았다. 30세 되던 해인 1905년에는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우국지사들의 자결이 속출함에 의사께서는 비분강개하여 설위조곡하였고 마침내 35세되던 해인 1910년에 한일합방이라는 미증유의 국치를 당함에 이르러서는 동지와 더불어 치제3일하고 하늘에 고유하기를 "황천은 굽어 살피소서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땅에서는 두 임금이 없거늘 주상이 건재하신데 왜인통치는 천리를 위반한 것이오니 즉각 물리쳐주소서"라고 하면서 탄식하였다. 이렇듯 조국의 멸망을 목도한 의사께서는 한 목숨 조국광복 투쟁에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하고 마방을 운영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원근의 청보를 모집하던 중 43세되던 해인 1919년 기미년에 일제의 폭정에 맞선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폭발한 2천만 동포의 항일 만세함성은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외에까지 울려 퍼졌으며 그 여파는 강원도 홍천에 까지 밀려와 물걸리의 김의사께서는 4월 3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우선 내촌면 화면장 평리 서석면 내면 방내리 인제군 인제면 상남리 등 2개군 5개 면에 밀서로 연락하여 시위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드디어 4월 3일 날이 밝자 이곳 물걸리 전영균의 약방 앞은 본부가 되어 대형 태극기가 높이 게양되었다. 이에 주민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비석거리 다리목 시장을 입추의 여지없이 메우고 인근 농경지까지 인파로 넘치니 족히 수천 명이었다. 부장두 전성렬의 사회로 등단하신 의사께서는 장두로서 궐기사를 하시기를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이곳에 모였으니 한 사람도 이탈없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웁시다"라고 열변을 토하니 일제침략과 압제에 울분하여 운집한 3천군중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니 그 기세는 더욱 하늘을 찔르고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무슨 천인공노할 일이랴!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대하여 미리 매복하고 읷던 왜정 헌병대가 일제히 무차별 발포람에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이여선 연의진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 등은 그 자리에서 순국하여 8열이라는 이름을 천추에 남기게 되었고 함춘선 승만수 등 1백여 명이 부상하고 군중은 산지사방하여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튿날에도 왜헌병대의 수색작전은 계속되어 가담자들이 줄줄이 체포되는 가운데 의사께서는 뒷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피신하였더니 가족들은 고문을 당하고 가옥은 전소하여 가문이 풍비박산되었다. 이후 의사께서는 복골의 장봉과 가루개의 척야산을 전전하면서 산중토굴에서 은신하다가 이내 피신처를 옮기는 수법으로 잦이면 용호대 외딴 집의 다락방에서 짚신을 삼고 밤이면 덕원산로를 왕래하였는데 때때로 왜경의 내습이 있으면 청로봉과 앙천봉에도 은신하면서 3년간 풍찬노숙하였다. 그런중 아뿔사! 워낙 효행이 지극한 의사인지라 선고 제일밤 내촌면 장수원 근처 산에서 차배차 하산 중 잠복 왜경에게 검거되고 말았으니 조국광복을 향한 의사의 암울한 심사와 통분을 어찌 헤아릴수 있으랴! 의사께서는 춘천형무소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나머지 양안이 실명되었고 지체마저 불수한 채 4년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옥고의 후유증과 중병을 이길 수 없어 결국 3년을 넘기지 못하고 1928년에 53세를 명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쳤으니 의사가 남긴 것은 김해김씨와 의사 사이에 태어난 치호 창흥 두 아들의 고달픈 연명뿐이었다. 오호라! 의사께서는 유서깊은 망족에다가 천석꾼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유영화가 점지되었데도 일찍이 애민정신과 부정척결에 눈을 떠 3불인 이라던 동학에 입도하여 후천개벽과 광제창생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또한 반족이 멀리하던 마방을 운영하여 시국을 살피고 동지를 규합하여 때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제의 총검앞에 의연히 맞섰건만 그 위대한 의거의 보상은 통고의 세월만이 기다릴뿐이었고 유택마저 묘연하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구하여는 한가닥 붉은 마음은 끝내 감천하여 조국은 광복되었고 바야흐로 광복 50주년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그 얼을 현창하려하니 그 뜻에 감사하여 경의를 표한다. 오늘날 의사의 충정과 그 공을 기리는 돌비가 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던 그 자리에 세워짐에 이에 명하노니 당신의 인간사랑 사민을 울렸고 그 용맹과 지도력은 대중을 모았도다. 숭고한 애국애정 일월처럼 빛나는데 물걸리의 그 때 그 함성은 아직도 산하에 은은하구나.
1998년 무인년 4월 도원서회회장 이준호 근서
김덕원 항일투쟁기공비 주변에 김덕원 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비가 여럿 있다.
추모 김의사 덕원

우리 산하 되찾자는 뜻 비장한데
마방에 몸을 부쳐서 계책이 깊어갔네
아! 대한독립만세소리 높이 치솟았던 땅 의로운 넋
오늘에 다시 찾을 수 있으려나

이동환 : 고려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한국학 문학회 회장
권창률 : 한국미술협회부회장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지금도 울리는 함성소리

백두 영봉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 여기서 멈추고 정기 넘실거리는 골짜기를 메아리치며 울려오는 함성 소리를 듣는다
다섯 고을 구천 여 민초들이 맨주먹 알몸으로 띠를 엮어 출렁이며 용트림 치던 여기 마방 옛터 팔열사 뜨거운 충정 꽃잎되어 흩날리던 그날의 함성 소리가 들린다
민권의 횃불 높이 들어라 항일의 깃발 노도되어 춤추게 하라 김덕원 의사의 칼날같은 목소리 그날의 충혼으로 다시 돌아와 억겁을 출렁일 성역이어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상봉승 짓고 강원서예대전 운영위원장 이만진 쓰다
동창마을의 하늘

사람은 하늘
하늘은 사람
천도의 나라를 열었네

동창 들녘
일백리 물길을 뚫고
삼십리 옥답을 일구었네

잔혹한 왜병의 총칼
이 땅을 유린할 때
마방에 관솔 밝혀
암흑을 꿰둟었네

기미년 사월 만세 후에는
백년이 가고
천년이 가도
사람은 하늘
하늘은 사람이네

천구백구십구년 사월
강원일보사 논설주간 김영기 짓고
원광대학교 서예과 강사 신명숙 쓰다
頌 金義士 德元(송 김의사 덕원)

지형과 인걸이 관계 있음을
홍천땅 산수에서 깨달음이여
의사는 천석꾼 집안에 나서
어려서도 호방하고 잘 생겼었네
젊어서 먼저 깨어 동학에 들어
가업을 팽개치고 마방을 여니
이 어찌 먹고 살기 위함이리오
가슴 속 나라 근심 숨겨진 계략
기미년 봄 우링찬 만세 소리에
펄럭이던 태극기 또렷도 했네
피해 지낸 세 해의 옥중의 네 해
살아선 앞 못 보더니 무덤도 없네

1997년 정축 봄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
의성후인 김종길 짓고 쓰다
님의 목소리 뜨거운 피로 김덕원 의사를 기리며

저것은 나무가 아니다
저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저것은 불이며 꽃이 아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마실 수 있는
모든 것에는
님의 목소리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나니
기억하거라
어떻게 우리가 지금
하늘을 이고 이 땅 위에서 있는가를

전 문화부장관 예술원회원 문학평론가
무인년 겨울 이어령 짓고
국권심사위원 서울시 서예대전 선정위원
미협서예분과위원 지남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