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49-19
- 탐방로그
- 의병대장 문태수 장군의 기공비가 광풍루 옆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3-1-16 / 관리자: 함양군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는 안의면에서 거병한 의재 문태서(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1963) 의병장의 공적을 기려 1970년 3월에 건립되었다.
장군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금강산에 들어가 병법을 연구하던 중 1905년에 일본이 외교권을 강탈하자 금강산을 나와 최익현의 의병에 참가하였으나 최익현 선생의 피체 이후 뒤를 도모하였다. 1907년에 일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을 감행하자 해산된 군대가 모두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운동이 전개되었고, 장군은 덕유산을 근거지로 부하 약 200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전라도 등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습격하고 타격을 주었다.
이후 전국적 의병의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했다가 진공이 중지되자 옥천군 이원역을 폭파하기도 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대대적인 공세에 몰린 장군은 유격전을 벌이다 1912년 8월 본가 방문 중 왜국밀정의 계략에 빠져 피체, 1913년 서울에서 34세의 나이에 옥사하였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3-1-16 / 관리자: 함양군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는 안의면에서 거병한 의재 문태서(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1963) 의병장의 공적을 기려 1970년 3월에 건립되었다.
장군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금강산에 들어가 병법을 연구하던 중 1905년에 일본이 외교권을 강탈하자 금강산을 나와 최익현의 의병에 참가하였으나 최익현 선생의 피체 이후 뒤를 도모하였다. 1907년에 일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을 감행하자 해산된 군대가 모두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운동이 전개되었고, 장군은 덕유산을 근거지로 부하 약 200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전라도 등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습격하고 타격을 주었다.
이후 전국적 의병의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했다가 진공이 중지되자 옥천군 이원역을 폭파하기도 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대대적인 공세에 몰린 장군은 유격전을 벌이다 1912년 8월 본가 방문 중 왜국밀정의 계략에 빠져 피체, 1913년 서울에서 34세의 나이에 옥사하였다.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
대한제국 말년에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의 운명이 위급할 때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구국일념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운 애국지사가 많거니와 덕유산을 중심으로 호남 영남 호서 지방에서 가장 빛나게 활약한 분은 문태서 대장이다. 1963년에 정부에서 그 공을 높이 평가하여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드렸거니와 또 지방유지 하충현씨가 장군의 업적을 영구히 전하기 위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함으로 독립유공자의 공적조서를 주관하였던 나로서 사양할 수 없어 붓을 드는 바이다. 장군의 본명은 태진이요 태서는 그 자이다. 본은 남평이요 고려 명신 문익점의 후예로 1880년 3월 16일 안의현 서상
면 장구지동에서 탄생하였는데 아버지는 병현이요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부터 장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절륜하며 서사에 능통하였다. 1904년에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군은 금강산에 들어가 병법을 연구하고 1905년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강탈하는 동시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내정을 간섭하므로 장군은 금강산을 나와 이듬해 최익현의 의병에 참가하였으나 최익현이 대마도로 잡혀간 뒤 집으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하였다. 1907년에 일제가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을 강행한 뒤 해산된 군대가 모두 의병으로 화하여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장군은 덕유산을 근거지로 부하 약 200명을 거느리고 선봉장 박춘실 등과 함께 여러번 무주 장수 용담 안의 거창 지례 남원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하고 혹은 상주 영동 옥천 안성 등지에 출동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1909년에 전국의 의병이 총연합하여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삼고 서울의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할때 장군은 서울로 향하여 진군하였으나 이원에 이르러 서울 공격이 중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원역을 폭파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무기의 열세로 일본군을 당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1910년 합방 이후부터는 대대적인 일본군의 반격전을 만나 소부대 유격전으로 전술을 바꾸어 항전을 계속하던 중 1912년 8월 17일 본가에 돌아온 사이에 왜군밀정의 위게에 빠져 일군에 체포되어 1913년 2월 4일 3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서울에서 옥사하였다 유해는
고향에 안장 하였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함창김씨와 아들 셋이 있는데 택주 학주 옥주다. 당시의 의병은 민폐를 끼치는 일이 많았으나 장군은 부하를 엄중히 단속하여 인민을 보하한 까닭에 1909년 무주 군민이 장군의 송덕비를 세웠으니 장군은 실로 위대한 의병대장이었다.
1970년 2월 일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장 신석호 지음 연안후인 이영달 씀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 건립추진위원회 세움
1970년 2월 일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장 신석호 지음 연안후인 이영달 씀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 건립추진위원회 세움
안의면에 위치한 광풍루를 찾았다.
光風樓(광풍루)
光風樓(광풍루)
안의 광풍루(安義 光風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이 누각(樓閣)은 1412년(태종 12)에 당시 이안(利安, '안의'의 옛 이름) 현감이던 전우(全遇, 생몰 연대 미상)가 건립하였는데, 당시의 이름은 선화루(宣化樓)였다. 그 후, 1425년(세종 7)에 김홍의(金洪毅)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으며, 1494년(성종 25)에 안의현감(安義縣監)이던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중건하면서 이름을 광풍루 바꾸었다. 이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타는 등,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풍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기둥의 주춧돌은 둥글게 깎아 만들었다. 지붕의 경사면에 처마를 하나 덧댄 팔작지붕을 연출하였으나, 처마 돌출이 작기 때문에 호방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장식을 배제한 소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함양 읍내의 학사루(學士樓)와 유사한 건축 양식이다. 광풍루는 금호강을 앞으로 하고 안의 읍내를 뒤로하면서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지었다. 그러나 오늘날 강은 하천 개발로 그 모습을 잃어버렸고, 후면에 상가와 민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겼을 풍류를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누각 위에 걸린 옛 시인의 글귀만이 옛 금호강변의 아름다운 '빛과 바람[光風]'의 느낌을 전해줄 뿐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이 누각(樓閣)은 1412년(태종 12)에 당시 이안(利安, '안의'의 옛 이름) 현감이던 전우(全遇, 생몰 연대 미상)가 건립하였는데, 당시의 이름은 선화루(宣化樓)였다. 그 후, 1425년(세종 7)에 김홍의(金洪毅)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으며, 1494년(성종 25)에 안의현감(安義縣監)이던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중건하면서 이름을 광풍루 바꾸었다. 이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타는 등,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풍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기둥의 주춧돌은 둥글게 깎아 만들었다. 지붕의 경사면에 처마를 하나 덧댄 팔작지붕을 연출하였으나, 처마 돌출이 작기 때문에 호방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장식을 배제한 소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함양 읍내의 학사루(學士樓)와 유사한 건축 양식이다. 광풍루는 금호강을 앞으로 하고 안의 읍내를 뒤로하면서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지었다. 그러나 오늘날 강은 하천 개발로 그 모습을 잃어버렸고, 후면에 상가와 민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겼을 풍류를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누각 위에 걸린 옛 시인의 글귀만이 옛 금호강변의 아름다운 '빛과 바람[光風]'의 느낌을 전해줄 뿐이다.
의병대장 문태서(문태수)장군의 기공비가 광풍루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