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95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영원사(靈源寺)
전통사찰 제106호(등록 2003.1.24)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953번지
이 사찰은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고승이었던 영원대사가 건립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영원사라 하며 지리산 중턱 해발 920m에 위치하고 있고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한때 내지리에서는 제일 큰 사찰로서 절의 규모는 너와로 된 선방이 9채에 100칸이 넘는 방이 있었으며, 고승들이 스쳐간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실안록을 보면 부용영관, 서산대사, 청매, 사명, 지안, 설파 상언, 포광 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수 반란 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건물 전체가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새로 부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사찰 경내지에는 영암당탑, 설파당탑, 중봉당탑, 청계당탑, 벽허당탑, 청매탑 등 이름 있는 스님들이 수도하던 곳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고승의 호를 딴 부도군이 현존하고 있다.
엽송설화 30건을 기록했다는 구곡 각운대사의 사리를 보존했다는 상무주암의 필단사리 3층석탑이 방광했다는 이야기는 지난 날의 유서깊은 영원사의 선풍을 말해 주고 있다.
전통사찰 제106호(등록 2003.1.24)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953번지
이 사찰은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고승이었던 영원대사가 건립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영원사라 하며 지리산 중턱 해발 920m에 위치하고 있고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한때 내지리에서는 제일 큰 사찰로서 절의 규모는 너와로 된 선방이 9채에 100칸이 넘는 방이 있었으며, 고승들이 스쳐간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실안록을 보면 부용영관, 서산대사, 청매, 사명, 지안, 설파 상언, 포광 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수 반란 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건물 전체가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새로 부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사찰 경내지에는 영암당탑, 설파당탑, 중봉당탑, 청계당탑, 벽허당탑, 청매탑 등 이름 있는 스님들이 수도하던 곳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고승의 호를 딴 부도군이 현존하고 있다.
엽송설화 30건을 기록했다는 구곡 각운대사의 사리를 보존했다는 상무주암의 필단사리 3층석탑이 방광했다는 이야기는 지난 날의 유서깊은 영원사의 선풍을 말해 주고 있다.
지리산 영원사 109 조사전 복원불사
백초월(白初月)은 경남 진주(晋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같은해 7월에는 비밀출판물로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여 국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8월 전남 천은사(泉隱寺)의 주지인 하룡하(河龍河)로부터 군자금으로 200원을 받고 동년 10월 7일에 다시 300원을 모금하여 만주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독립군(獨立軍)에 11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6명을 각각 선발하여 그들에게 여비를 주어 군자금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을 기하여 시위계획을 세워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붙잡혔으며, 일본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반미친 상태의 폐인이 되어 서울 마포(麻浦)의 어느 포교실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후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붙잡혀 1920년 3월 9일 서울로 이송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0년 4월 6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귀국한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붙잡혔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청주(淸州)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953 영원사 법당 앞 애국지사 백초월 선사 출가 및 재건불사 사찰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智異山 靈源寺(지리산 영원사)
智異山 靈源寺(지리산 영원사)
대한불교 조계종 靈源寺(영원사)
정말 매우 깊은 지리산 중턱에 있는 절이었다.
정말 매우 깊은 지리산 중턱에 있는 절이었다.
백초월 스님과 영원사
백초월 스님과 영원사
영원사 출신인 백초월(白初月) 스님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큰 공적을 남긴 불교 독립운동가이시다.
초월스님은 경남 고성군 영오면에서 1878에 출생하셨는데, 14세의 나이로 이곳 영원사로 출가하셨다. 해인사의 강원.선원에서 수학을 하셨으며, 지리산 일대의 의병활동을 지켜보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셨다. 30대 초반에 영원사 조실(祖室).강백(講伯)이셨고, 범어사와 해인사의 강사를 역임하셨다. 그리고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학림의 불교 강사로 내정될 정도로 당시 최고의 강백이셨다.
1911년 이곳 영원사가 화재로 전소되자, 영원사 주지로 재건불사(1914~1917)를 주관하셨다. 그 이후에는 용화사(법주사 청주 포교당)에서 포교에 전념하셨다. 이때, 3.1운동(1919)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나 서울로 올라가 진관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 불교계 민족대표이셨던 백용성스님과 한용운스님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시자, 초월스님은 중앙학림에 불교의 독립운동본부(민단본부)를 두고 학인스님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셨다.
천은사, 화엄사, 통도사, 범어사 등에서 모은 독립자금을 상해의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에 제공하셨고, 불교청년들을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군에 보내셨다. 독립운동을 하시다 일제에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결코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으셨다. 초월스님은 출옥하신 이후, 불교사상에 근거한 일심교(一心敎)라는 항일 결사단체를 만드셨고, 동학사, 월정사, 봉원사에서 강사를 하시면서 스님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셨다. 1939년 10월, 용산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 낙서를 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2년 6개월 동안 수감되셨는데, 출옥한 후에도 독립자금을 모금하시다 청주감옥에 수감되셨고, 안타깝게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4년 6월 29일, 옥중 순국하셨다. 초월스님은 입적하신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으셨던 참다운 보살, 큰스님이셨다.
2016년 11월 17일, 진관사에서 3개 자치단체인 고성군(옥찬사, 출생), 함양군(영원사, 출가), 은평구(진관사, 독립운동)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백초월 스님 선양사업을 공동으로 추진
영원사 출신인 백초월(白初月) 스님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큰 공적을 남긴 불교 독립운동가이시다.
초월스님은 경남 고성군 영오면에서 1878에 출생하셨는데, 14세의 나이로 이곳 영원사로 출가하셨다. 해인사의 강원.선원에서 수학을 하셨으며, 지리산 일대의 의병활동을 지켜보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셨다. 30대 초반에 영원사 조실(祖室).강백(講伯)이셨고, 범어사와 해인사의 강사를 역임하셨다. 그리고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학림의 불교 강사로 내정될 정도로 당시 최고의 강백이셨다.
1911년 이곳 영원사가 화재로 전소되자, 영원사 주지로 재건불사(1914~1917)를 주관하셨다. 그 이후에는 용화사(법주사 청주 포교당)에서 포교에 전념하셨다. 이때, 3.1운동(1919)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나 서울로 올라가 진관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 불교계 민족대표이셨던 백용성스님과 한용운스님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시자, 초월스님은 중앙학림에 불교의 독립운동본부(민단본부)를 두고 학인스님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셨다.
천은사, 화엄사, 통도사, 범어사 등에서 모은 독립자금을 상해의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에 제공하셨고, 불교청년들을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군에 보내셨다. 독립운동을 하시다 일제에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결코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으셨다. 초월스님은 출옥하신 이후, 불교사상에 근거한 일심교(一心敎)라는 항일 결사단체를 만드셨고, 동학사, 월정사, 봉원사에서 강사를 하시면서 스님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셨다. 1939년 10월, 용산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 낙서를 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2년 6개월 동안 수감되셨는데, 출옥한 후에도 독립자금을 모금하시다 청주감옥에 수감되셨고, 안타깝게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4년 6월 29일, 옥중 순국하셨다. 초월스님은 입적하신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으셨던 참다운 보살, 큰스님이셨다.
2016년 11월 17일, 진관사에서 3개 자치단체인 고성군(옥찬사, 출생), 함양군(영원사, 출가), 은평구(진관사, 독립운동)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백초월 스님 선양사업을 공동으로 추진
지리산 영원사
지리산 영원사
지리산은 예로부터 사대명산(지리산,금강산,묘향산.구월산)중에서 그 첫번째로, 영원사는 이 명산 한복판에 1200년전 신라 제사18대 경문왕때 영원조사꼐서 창건한 고찰이다. 이곳은 부용,서산,사명,청매 조사와 화엄보살인 설파노사등 고승들이 수행정진하시고 강종을 울려 한국불교의 명맥 이어가던 법보명찰이기도 하다. 남쪽으로는 청매조사께서 수십년 수도하신 도솔내원궁 같은 도솔암이 있고, 북쪽에는 절승선경인상무주암이 있는데, 이 상무주암은 보조국사께서 갑천에서 제일이라고 예찬하셨고, 구곡 각운선사는 염송설화를 짓다가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는 명찰이다. 그 가운데에 자리한 명성고찰 영원사는 여순반란과 육이오동란때 공비토벌작전 수행 중 아군에 의해 방화소실되어 쑥대밭에 빈터만 남게되었다. 그러던중 상무주암에서 십여년전 용맹정신하시던 대일스님께서 어느날 조사님의 선몽의 말씀을 듣고 큰 원을 세워 초막을 짓기시작 사십여년을 단신으로 불사를 하시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영원사는 특히 109분의 조사님들의 안록을 잘보존하고 있는 절로서, 매년 9월 18일 지장재일에는 109분의 영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사대명산(지리산,금강산,묘향산.구월산)중에서 그 첫번째로, 영원사는 이 명산 한복판에 1200년전 신라 제사18대 경문왕때 영원조사꼐서 창건한 고찰이다. 이곳은 부용,서산,사명,청매 조사와 화엄보살인 설파노사등 고승들이 수행정진하시고 강종을 울려 한국불교의 명맥 이어가던 법보명찰이기도 하다. 남쪽으로는 청매조사께서 수십년 수도하신 도솔내원궁 같은 도솔암이 있고, 북쪽에는 절승선경인상무주암이 있는데, 이 상무주암은 보조국사께서 갑천에서 제일이라고 예찬하셨고, 구곡 각운선사는 염송설화를 짓다가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는 명찰이다. 그 가운데에 자리한 명성고찰 영원사는 여순반란과 육이오동란때 공비토벌작전 수행 중 아군에 의해 방화소실되어 쑥대밭에 빈터만 남게되었다. 그러던중 상무주암에서 십여년전 용맹정신하시던 대일스님께서 어느날 조사님의 선몽의 말씀을 듣고 큰 원을 세워 초막을 짓기시작 사십여년을 단신으로 불사를 하시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영원사는 특히 109분의 조사님들의 안록을 잘보존하고 있는 절로서, 매년 9월 18일 지장재일에는 109분의 영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頭流禪林(두류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