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산6-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마천의 찬가 – 작사 : 최점갑 / 작곡 : 신영철
1. 지리산 정기받은 이상의 고장 우리들의 보금자리 이곳이란다. 자원도 넘치고 인정도 넘치니 임천강에 띄워서 모두에게 나누리 아- 자랑스럽다 우리의 고장 마천골
2. 영산의 서기어린 총명의 고장 우리들은 나래 길러 웅비하리라. 산수가 수려해 낙원이리니 찾는이들 정답게 맞이하여 반기리. 아- 자랑스럽다 우리의 고장 마천골
마천의 노래가 뜻하는 것
① 자랑스런 우리의 고장을 찬미하고 애향심을 높임과 동시에 이를 소중히 가꾸자는데 뜻을 두고
② 후진들이 보다 큰 뜻을 펴나가므로서 홍익인간의 육성을 기하고자함
③ 1.2절 공히 첫째와 둘째 구는 고장의 역사와 환경을 노래하였고
④ 셋째와 넷째구는 이상과 희망 그리고 다섯째구는 후렴이다
⑤ 1절에서 흘려보낸 자원과 인정이 2절에 다시 다른 형태로 돌아온다는데 큰 뜻을 지니고 있다
⑥ 나래 다듬고.... 이는 장차 웅비를 위한 재능을 익힌다는 뜻임
⑦ 임천강에 띄워서는 널리 온 누리에 나누어줄 수 있는 부를 뜻함
1. 지리산 정기받은 이상의 고장 우리들의 보금자리 이곳이란다. 자원도 넘치고 인정도 넘치니 임천강에 띄워서 모두에게 나누리 아- 자랑스럽다 우리의 고장 마천골
2. 영산의 서기어린 총명의 고장 우리들은 나래 길러 웅비하리라. 산수가 수려해 낙원이리니 찾는이들 정답게 맞이하여 반기리. 아- 자랑스럽다 우리의 고장 마천골
마천의 노래가 뜻하는 것
① 자랑스런 우리의 고장을 찬미하고 애향심을 높임과 동시에 이를 소중히 가꾸자는데 뜻을 두고
② 후진들이 보다 큰 뜻을 펴나가므로서 홍익인간의 육성을 기하고자함
③ 1.2절 공히 첫째와 둘째 구는 고장의 역사와 환경을 노래하였고
④ 셋째와 넷째구는 이상과 희망 그리고 다섯째구는 후렴이다
⑤ 1절에서 흘려보낸 자원과 인정이 2절에 다시 다른 형태로 돌아온다는데 큰 뜻을 지니고 있다
⑥ 나래 다듬고.... 이는 장차 웅비를 위한 재능을 익힌다는 뜻임
⑦ 임천강에 띄워서는 널리 온 누리에 나누어줄 수 있는 부를 뜻함
마천의 찬가 – 작사 : 최점갑 / 작곡 : 신영철
1. 지리산 정기받은 이상의 고장 우리들의 보금자리 이곳이란다. 자원도 넘치고 인정도 넘치니 임천강에 띄워서 모두에게 나누리 아- 자랑스럽다 우리의 고장 마천골
2. 영산의 서기어린 총명의 고장 우리들은 나래 길러 웅비하리라. 산수가 수려해 낙원이리니 찾는이들 정답게 맞이하여 반기리. 아- 자랑스럽다 우리의 고장 마천골
1. 지리산 정기받은 이상의 고장 우리들의 보금자리 이곳이란다. 자원도 넘치고 인정도 넘치니 임천강에 띄워서 모두에게 나누리 아- 자랑스럽다 우리의 고장 마천골
2. 영산의 서기어린 총명의 고장 우리들은 나래 길러 웅비하리라. 산수가 수려해 낙원이리니 찾는이들 정답게 맞이하여 반기리. 아- 자랑스럽다 우리의 고장 마천골
전적비 건립기
이 의병장 석상용 선생 전적비는 선생의 나라사랑에 쏟은 열정과 그 빛나는 항일정신을 높이 받들어 후세인들에게 애국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광복 50주년을 기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 고장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겨오던 우리들은 1994년 6월 11일 전적비 건립추진위원회 발기인회를 개최하고 사업을 기획하였으며 1995년 2월 15일에 추진워원회를 개최하여 그 출범을 보았다.
그후 건립비용을 조달함에 있어 뜻을 같이하는 이 고장 출신인들의 성금과 해주석씨 문중을 비롯하여 지방행정당국의 사업비 지원금 등으로 이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전적비를 제막함에 있어 이 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주신 많은 분들의 성의에 감사드리며 고 석상용 의병장의 빛나는 애국정신이 온 겨레들의 가슴에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막의 줄을 당기는 바이다.
1995년 8월 15일
제막에 즈음하여 의병장 석상룡 선생 전적비 건립추진위원회 회원 일동
이 의병장 석상용 선생 전적비는 선생의 나라사랑에 쏟은 열정과 그 빛나는 항일정신을 높이 받들어 후세인들에게 애국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광복 50주년을 기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 고장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겨오던 우리들은 1994년 6월 11일 전적비 건립추진위원회 발기인회를 개최하고 사업을 기획하였으며 1995년 2월 15일에 추진워원회를 개최하여 그 출범을 보았다.
그후 건립비용을 조달함에 있어 뜻을 같이하는 이 고장 출신인들의 성금과 해주석씨 문중을 비롯하여 지방행정당국의 사업비 지원금 등으로 이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전적비를 제막함에 있어 이 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주신 많은 분들의 성의에 감사드리며 고 석상용 의병장의 빛나는 애국정신이 온 겨레들의 가슴에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막의 줄을 당기는 바이다.
1995년 8월 15일
제막에 즈음하여 의병장 석상룡 선생 전적비 건립추진위원회 회원 일동
義兵將 石祥龍 先生 戰蹟碑(의병장 석상용 선생 전적비)
20세기에 들면서 이 나라에는 진한 먹구름이 덮히기 시작하였다. 대륙진출을 노리던 일본국은 드디어 친일주구들을 앞세워 강제로 을사5조약을 맺고 국제외교권을 박탈하는 한편 1907년에는 조선관군을 해산시켰으니 삼천리강산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곡성이 메아리쳤고 눈물은 흘러서 강물에 홍수를 이루었다.
그때 그 무렵 전국의 우국지사들은 의병대를 조직하여 맞싸우게 되었으니 우리고장에서는 본면 추성리 출신의 석상용 선생이 의병활동을 지휘하였는 바 그 대표적인 전투가 실상사전투와 쑥받재 그리고 벽소령 및 삼성재 전투 등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소에 담대하고 용맹하였으며 의협심이 강했던 선생은 나라 잃은 설움을 설욕하고자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에게 불시기습의 유격전을 펴왔으니 그들에게는 항상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1907년 살상사에는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선생은 1908년 4월 29일(음 3월 그믐날) 캄캄한 야음을 이용해 약 50여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습격하였다. 크게 놀란 왜군은 절뜰에 쌓아둔 나뭇가리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반격하였다. 오랜 접전끝에 의병대는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으나 그후 5월 11일(음 4월 12일) 왜군들은 본면 도마리 서당에다 주민을 모아놓고 집단학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당시의 본면 면장 노지현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는 1907년 말부터 5년간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어 왔지만 운명의 신은 계속 선생의 곁에서 같이 해주지를 아니하였다. 1870년 11월 21일(음 10월 29일)생인 선생은 1912년 왜군에게 잡혀 진주형무소에서 5년간의 수형생활을 했고 출옥 후에는 옥중에서 당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고에 시달리다가 1920년 12월 6일(음 10월 26일) 50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하시었다.
명의 유민이신 선생의 귀화사는 멀리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선조 25년) 왜의 풍신수길(도요토미히데요시)은 조총으로 무장한 15만의 군단을 이 땅에 상륙시켜 삼천리강산을 휩쓸게 하였고 의자로 피난길에 올랐던 선조는 급보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하였지만 그때는 명도 북쪽 변상에서 몽고족의 일파인 오이파트 따다르족의 외침에 시달리던 때여서 원군을 파병할 여력이 없다며 이를 거절해 왔다. 그러나 그때 명의 병부상서이던 석성은 조선의 침략은 곧 명의 침략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을 펴 이여송의 원군이 오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왜는 일단 물러갔으나 그는 그후 정적들로부터 정유재란에 대한 외교 실패라는 문책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처형되였으며 그 후손들이 조선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하게 되었으니 그 13대 종손이 석상용 선생이시다. 오늘 우리 본비 건립위원회 회원 일동은 조국광복 50주년을 맞이함에 있어 대를 이어 항일에 몸 바치신 선생의 거룩한 애국정신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 삼가 명복을 빌면서 후세에 길이 귀감으로 삼고자 그 내력을 이 돌에 새겨 전하는 바이다.
1995년 8월 15일 석상용 선생 전적비 건립추진위원회 회원 일동
그때 그 무렵 전국의 우국지사들은 의병대를 조직하여 맞싸우게 되었으니 우리고장에서는 본면 추성리 출신의 석상용 선생이 의병활동을 지휘하였는 바 그 대표적인 전투가 실상사전투와 쑥받재 그리고 벽소령 및 삼성재 전투 등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소에 담대하고 용맹하였으며 의협심이 강했던 선생은 나라 잃은 설움을 설욕하고자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에게 불시기습의 유격전을 펴왔으니 그들에게는 항상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1907년 살상사에는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선생은 1908년 4월 29일(음 3월 그믐날) 캄캄한 야음을 이용해 약 50여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습격하였다. 크게 놀란 왜군은 절뜰에 쌓아둔 나뭇가리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반격하였다. 오랜 접전끝에 의병대는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으나 그후 5월 11일(음 4월 12일) 왜군들은 본면 도마리 서당에다 주민을 모아놓고 집단학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당시의 본면 면장 노지현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는 1907년 말부터 5년간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어 왔지만 운명의 신은 계속 선생의 곁에서 같이 해주지를 아니하였다. 1870년 11월 21일(음 10월 29일)생인 선생은 1912년 왜군에게 잡혀 진주형무소에서 5년간의 수형생활을 했고 출옥 후에는 옥중에서 당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고에 시달리다가 1920년 12월 6일(음 10월 26일) 50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하시었다.
명의 유민이신 선생의 귀화사는 멀리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선조 25년) 왜의 풍신수길(도요토미히데요시)은 조총으로 무장한 15만의 군단을 이 땅에 상륙시켜 삼천리강산을 휩쓸게 하였고 의자로 피난길에 올랐던 선조는 급보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하였지만 그때는 명도 북쪽 변상에서 몽고족의 일파인 오이파트 따다르족의 외침에 시달리던 때여서 원군을 파병할 여력이 없다며 이를 거절해 왔다. 그러나 그때 명의 병부상서이던 석성은 조선의 침략은 곧 명의 침략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을 펴 이여송의 원군이 오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왜는 일단 물러갔으나 그는 그후 정적들로부터 정유재란에 대한 외교 실패라는 문책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처형되였으며 그 후손들이 조선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하게 되었으니 그 13대 종손이 석상용 선생이시다. 오늘 우리 본비 건립위원회 회원 일동은 조국광복 50주년을 맞이함에 있어 대를 이어 항일에 몸 바치신 선생의 거룩한 애국정신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 삼가 명복을 빌면서 후세에 길이 귀감으로 삼고자 그 내력을 이 돌에 새겨 전하는 바이다.
1995년 8월 15일 석상용 선생 전적비 건립추진위원회 회원 일동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산 6-1.
의병장 석상용 선생 전적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43-1-10호
소재지: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산6-1
이 전적비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실상사, 쑥밭재, 벽소령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함양 남원지역 등에서 의병활동을 한 석상용(石祥龍: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의병장의 전적을 기려 건립되었다.
석상용 의병장은 1907년 함양 일대에서 5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고제량(高濟亮).·문태수(文泰洙,泰瑞) 의병장 등과 제휴하여 함양(咸陽)·산청(山淸)·남원(南原) 일대 등 대체로 지리산(智異山)을 본거지로 삼아 왜적 다수를 살상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11년 체포되어 5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16년 석방되었다.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43-1-10호
소재지: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산6-1
이 전적비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실상사, 쑥밭재, 벽소령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함양 남원지역 등에서 의병활동을 한 석상용(石祥龍: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의병장의 전적을 기려 건립되었다.
석상용 의병장은 1907년 함양 일대에서 5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고제량(高濟亮).·문태수(文泰洙,泰瑞) 의병장 등과 제휴하여 함양(咸陽)·산청(山淸)·남원(南原) 일대 등 대체로 지리산(智異山)을 본거지로 삼아 왜적 다수를 살상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11년 체포되어 5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16년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