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석 추모비

4

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 102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19년 3.1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져 함안에 비화하매 분노한 민중을 진두 지휘하여 영남에서 가장 치열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고, 그 후도 망국의 한을 안은 채 평생을 조국 광복에 바친 분이 이희석 선생이다. 선생의 자는 우범, 호는 백천, 본관은 인천이요, 아버님은 재훈 어머님은 영산신씨로서, 1892년 함안군 함안면 도림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부터 재질이 뛰어나 고향의 모원재, 동산정에서 한학을 공부할 때 고을 사람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세 때 경술국치를 당하매 비분강개 끝에 나라를 되찾는 데는 신학문의 흡수가 급선무임을 통감하고 홀연히 상경하여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부터 동지 이중건 선생이 설립한 여항면의 동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던 중 천지를 진동하는 3.1운동이 폭발하였다. 선생은 즉시 아우님 규석과 함께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
어 장날을 기하여 먼저 함안읍에서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9일 아침 동지들과 비봉산에 올라 고천제를 지낸 후 읍 중심지의 태평루에 큰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쥐게 하니 그 수가 2천이 넘었다. 선생의 호령에 따라 우편국 전화선을 절단하고 왜경 수명을 군중 앞에 꿇어앉힌 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어 자신의 무명지를 잘라 「대한독립만세」라고 혈서하여 흔드니, 흥분한 군중은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관공서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점거하여 수감중인 안지호 선생을 구출하였다. 이날 오후 마산에서 출동한 왜헌병 수십명이 시위 군중에게 총격을 가하니, 성난 군중은 맨손으로 대항하다가 해질 무렵에야 해산하였는데, 선생과 동지 수십명이 체포되었으나 각 면에서는 장날마다 만세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선생은 이해 12월 부산지법 마산지원에서 6년의 형을 언도받고 형무소로 이감 도중 왜경을 때려눕히고 탈주하였다. 그 후 강상대로 변성명하여 교묘히 피신해 나가면서 군내의 서당을 신학문 강습소로 개편하고 몸소 군북 사촌강습소 함안 대산강습소에서 많은 애국청년을 배출시켰다.
1930년부터는 서울에서 이중건 선생이 경영하던 신소년사의 주필을 맡아 민족의식 앙양에 헌신하였으며, 1940년 소위 창씨제도가 시행되자 죽어도 왜식으로 성을 바꿀 수 없다고 항거하다가 마침내 자녀들의 학교 교육마저 포기하고 강원도 금화 오선산에 은거하면서도 비밀리에 민족 운동을 계속하던 중 1944년 향년 3세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오호라 선생 가신 지 30여년, 휴전선 북녘에 있는 묘소를 찾을 길이 없고 탄시인 燈前懷宇宙(등전회우주) 客裏認光陰(객이인광음)을 알 사람조차 없다. 더욱이 6.25 동란 중 월남한 아드님 수
어 장날을 기하여 먼저 함안읍에서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9일 아침 동지들과 비봉산에 올라 고천제를 지낸 후 읍 중심지의 태평루에 큰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쥐게 하니 그 수가 2천이 넘었다. 선생의 호령에 따라 우편국 전화선을 절단하고 왜경 수명을 군중 앞에 꿇어앉힌 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어 자신의 무명지를 잘라 「대한독립만세」라고 혈서하여 흔드니, 흥분한 군중은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관공서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점거하여 수감중인 안지호 선생을 구출하였다. 이날 오후 마산에서 출동한 왜헌병 수십명이 시위 군중에게 총격을 가하니, 성난 군중은 맨손으로 대항하다가 해질 무렵에야 해산하였는데, 선생과 동지 수십명이 체포되었으나 각 면에서는 장날마다 만세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선생은 이해 12월 부산지법 마산지원에서 6년의 형을 언도받고 형무소로 이감 도중 왜경을 때려눕히고 탈주하였다. 그 후 강상대로 변성명하여 교묘히 피신해 나가면서 군내의 서당을 신학문 강습소로 개편하고 몸소 군북 사촌강습소 함안 대산강습소에서 많은 애국청년을 배출시켰다.
1930년부터는 서울에서 이중건 선생이 경영하던 신소년사의 주필을 맡아 민족의식 앙양에 헌신하였으며, 1940년 소위 창씨제도가 시행되자 죽어도 왜식으로 성을 바꿀 수 없다고 항거하다가 마침내 자녀들의 학교 교육마저 포기하고 강원도 금화 오선산에 은거하면서도 비밀리에 민족 운동을 계속하던 중 1944년 향년 3세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오호라 선생 가신 지 30여년, 휴전선 북녘에 있는 묘소를 찾을 길이 없고 탄시인 燈前懷宇宙(등전회우주) 客裏認光陰(객이인광음)을 알 사람조차 없다. 더욱이 6.25 동란 중 월남한 아드님 수
망하여 후사가 없는 일들이 한스럽다. 다행히 1951년부터 군내 사림이 매년 3월 15일 서산서원에서 선생을 비롯한 32 의사의 위령제를 올리고 있고, 이번에 온 고을 인사 제씨와 문하생들이 정성을 모아 이 추모비를 세우게 된 것은 만시지탄은 있으나 뜻깊은 일이다.
선생의 나라 사랑의 숭고한 얼과 독립 투쟁의 거룩한 행적을 길이 청사에 빛나리로다.
서기 1978년 삼일절 먼구름 한형석 지음 함안 조영제 씀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 1026 함안장터 3.1운동 만세시위 출발지 항일지사 백천 이희석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抗日志士 白泉 李喜錫 先生 追慕碑(항일지사 백천 이희석 선생 추모비)
抗日志士 白泉 李喜錫 先生 追慕碑(항일지사 백천 이희석 선생 추모비)
1919년 3.1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져 함안에 비화하매 분노한 민중을 진두 지휘하여 영남에서 가장 치열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고, 그 후도 망국의 한을 안은 채 평생을 조국 광복에 바친 분이 이희석 선생이다. 선생의 자는 우범, 호는 백천, 본관은 인천이요, 아버님은 재훈 어머님은 영산신씨로서, 1892년 함안군 함안면 도림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부터 재질이 뛰어나 고향의 모원재, 동산정에서 한학을 공부할 때 고을 사람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세 때 경술국치를 당하매 비분강개 끝에 나라를 되찾는 데는 신학문의 흡수가 급선무임을 통감하고 홀연히 상경하여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부터 동지 이중건 선생이 설립한 여항면의 동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던 중 천지를 진동하는 3.1운동이 폭발하였다. 선생은 즉시 아우님 규석과 함께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