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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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 131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처사 전주이공 원대 배 유인 광산김씨 지묘
서기 2009년 기축 4월 일
자 근주 근욱, 손 승문 석중 성일, 녀 근숙 주은, 사위 이종국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 1313 밤밭고개 남쪽 30m 능선 애국지사 이용우의 묘를 찾았다.
愛國志士 李龍佑 之墓(애국지사 이용우 지묘)
공의 성은 이요 본관은 전주요 휘는 용우이다. 공은 1898년 함안면 봉성동에서 부 휘 백이와 모 김해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나시다. 공은 강건한 체력으로 용맹이 뛰어나고 정의감이 강하며 애국심이 투철하였다. 1910년 민족적 굴욕의 한일합병을 당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구국항쟁을 결심하고 배일사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왔다. 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 의거가 경향 각지에서 봉기되자 공은 이희석 안
지호 선생 지도하에 안재영 외 수십 동지들과 규합하여 의거 준비를 엄밀히 진행하였다. 동년 음 2월 18일 함안읍 시일을 기하여 2천여 군중들이 물밀듯 몰려와서 군청 앞 태평루 위에 태극기를 높이 달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외치는 소리 산천을 진동하였다. 의거 군중이 합세하여 각 관공서를 점거하며 기물을 파괴하고 수감 동지 구출을 감행하였는데 돌연 내습한 왜병의 무차별 발포로 인하여 무수한 희생 및 부상자를 내었다. 공은 60여 동지와 함께 현장에서 체포되어 2년의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공은 시종의지를 굴하지 않고 출옥 후에도 향리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해 오다가 원통하게도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0년 6월 1일 별세하였다. 공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남은 원대요 손은 근주 근욱이다. 위훈에 보답하는 애국지사 표창이 1977년에 추서되고 이번에 나라 위한 충절의 일단을 청석에 새기게 되니 거룩한 행적이 길이 길이 빛날진저
서기 1984년 3월 일
인천 후 이향근 근찬, 순흥 후 안상율 근서, 경상남도지사 함안군수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