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산11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독립운동기념비
世○入場
1975.10. 이갑성
1975.10. 이갑성
서두르는 바람에 비석의 좌, 우면은 촬영을 하지않았다.
4년 지난후에 함안 추가탐방시에 재촬영하여 추가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민족의 자유는 여지없이 짓밟혀 삼천리강산은 마치 감옥처럼 변하고 이천만 동포는 누구나 다 포로가된 고초를 겪었다. 마침 제 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게 되자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수많은 지사 선열은 천재일우의 호기라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가일층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 기미만세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폭발하였으니 이것은 한일합병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였다.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 천지진동하는 맹렬한 기세는 적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 고장에서도 그 무서운 일제의 폭압을 박차고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므로 거룩한 선열들을 추모하여 3.1정신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시운다. 이곳은 낙동강변 모산하에 위치하여 1897년에 이령교회가 창설되고 1904년에 경명학교
4년 지난후에 함안 추가탐방시에 재촬영하여 추가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민족의 자유는 여지없이 짓밟혀 삼천리강산은 마치 감옥처럼 변하고 이천만 동포는 누구나 다 포로가된 고초를 겪었다. 마침 제 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게 되자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수많은 지사 선열은 천재일우의 호기라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가일층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 기미만세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폭발하였으니 이것은 한일합병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였다.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 천지진동하는 맹렬한 기세는 적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 고장에서도 그 무서운 일제의 폭압을 박차고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므로 거룩한 선열들을 추모하여 3.1정신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시운다. 이곳은 낙동강변 모산하에 위치하여 1897년에 이령교회가 창설되고 1904년에 경명학교
가 설립된 평화스러운 문화촌이다.
기미년 3월2일 고종황제의 인산 봉행식에 참여한 지방유지 김세민, 여봉준, 김주현, 윤기선, 황병민, 하갑수, 한세호, 정영실, 김홍찬, 김갑일, 황경수, 김차선, 안수원, 김정오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직접 참관하고 돌아와 3월6일 새말 예배당에서 김두량, 김수감, 이만웅, 여경천, 곽진수, 손학봉, 김금석, 림경환, 엄태경, 김만옥, 김윤석, 김성추, 황출이, 배양전, 박기우, 구제남, 이명이, 황마리아, 이귀애, 김혜림, 이선옥, 김혜숙, 김장덕, 곽성복, 임순우, 엄또일, 윤봉수, 진익이, 김순과 함께 모여서 3월9일 연개장날에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그 대책위원으로 윤기선, 여봉준, 곽성복, 김정오, 김주현을 선정일임하여 비밀리에 3일간 모든 대책을 세우다. 3월9일 정오 연개장터에서 남녀노소 수천군중이 총궐기하여 대회장 김세민의 개회사에 이어 유광도 격려연설, 김정오 선언문 낭독후 경명학교 학생들은 선두로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너무나 감격에 복받쳐 울기도하고 산하 각 마을을 순회한 후 석양에 산회하였다.
당일 행렬에 앞장선 분은 위에 기명한 이외에 문장환, 박쾌일, 하숙찬, 김도근, 김도석, 김경돈, 김찬욱, 차서식, 구사문, 김영수, 김성요, 배희도, 김우천, 김용이, 김우진, 이유근, 임용이, 곽종철, 이상안, 조은성, 김백은, 윤봉인, 양성만, 윤한경, 구찬문, 구역조, 윤봉기, 차학련, 차만갑, 한명수, 전수업, 이덕호, 황진규, 임제한, 김학률, 김영정 외 지방유지 다수이고 학생은 하갑조, 박종실, 윤효준, 차용학, 문삼갑, 배대위, 구주현, 김삼백 외 전원이다. 일후 칠원읍과 영산읍에 연락하여 칠원에 손종일, 엄주신, 박순익, 김성협, 영산에 김추은, 장진수, 구중회 등이 만세를 주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당시 삼칠방면은 마산경찰서 칠원 주재소 관할이므로 뒤늦게 조사를 받게 되었으나 윤기선, 여봉준, 한세호, 내외분들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관련자 다수가 구출되고 김세민 내외분은 수감자와 그 가족 생계비 조달을 위하여 많은 곤욕을 당했다. 김두량, 정영실은 칠원읍 만세사건 주모자로 마산 감옥에서 각 1년, 김정오는 서울 악학전문학교 재학 중에 학생주모자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임학찬은 창신학교 재직중 기밀 연락관계로 서울감옥에서 1년간 복역
기미년 3월2일 고종황제의 인산 봉행식에 참여한 지방유지 김세민, 여봉준, 김주현, 윤기선, 황병민, 하갑수, 한세호, 정영실, 김홍찬, 김갑일, 황경수, 김차선, 안수원, 김정오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직접 참관하고 돌아와 3월6일 새말 예배당에서 김두량, 김수감, 이만웅, 여경천, 곽진수, 손학봉, 김금석, 림경환, 엄태경, 김만옥, 김윤석, 김성추, 황출이, 배양전, 박기우, 구제남, 이명이, 황마리아, 이귀애, 김혜림, 이선옥, 김혜숙, 김장덕, 곽성복, 임순우, 엄또일, 윤봉수, 진익이, 김순과 함께 모여서 3월9일 연개장날에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그 대책위원으로 윤기선, 여봉준, 곽성복, 김정오, 김주현을 선정일임하여 비밀리에 3일간 모든 대책을 세우다. 3월9일 정오 연개장터에서 남녀노소 수천군중이 총궐기하여 대회장 김세민의 개회사에 이어 유광도 격려연설, 김정오 선언문 낭독후 경명학교 학생들은 선두로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너무나 감격에 복받쳐 울기도하고 산하 각 마을을 순회한 후 석양에 산회하였다.
당일 행렬에 앞장선 분은 위에 기명한 이외에 문장환, 박쾌일, 하숙찬, 김도근, 김도석, 김경돈, 김찬욱, 차서식, 구사문, 김영수, 김성요, 배희도, 김우천, 김용이, 김우진, 이유근, 임용이, 곽종철, 이상안, 조은성, 김백은, 윤봉인, 양성만, 윤한경, 구찬문, 구역조, 윤봉기, 차학련, 차만갑, 한명수, 전수업, 이덕호, 황진규, 임제한, 김학률, 김영정 외 지방유지 다수이고 학생은 하갑조, 박종실, 윤효준, 차용학, 문삼갑, 배대위, 구주현, 김삼백 외 전원이다. 일후 칠원읍과 영산읍에 연락하여 칠원에 손종일, 엄주신, 박순익, 김성협, 영산에 김추은, 장진수, 구중회 등이 만세를 주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당시 삼칠방면은 마산경찰서 칠원 주재소 관할이므로 뒤늦게 조사를 받게 되었으나 윤기선, 여봉준, 한세호, 내외분들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관련자 다수가 구출되고 김세민 내외분은 수감자와 그 가족 생계비 조달을 위하여 많은 곤욕을 당했다. 김두량, 정영실은 칠원읍 만세사건 주모자로 마산 감옥에서 각 1년, 김정오는 서울 악학전문학교 재학 중에 학생주모자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임학찬은 창신학교 재직중 기밀 연락관계로 서울감옥에서 1년간 복역
하고 김순은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재학 중 독립신문 발행에 가담하여 1년 6월의 형을 받았으며 세브란스의전 학생 배동석은 전국 학생 주모자로 2년의 형을 받고 심한 고문으로 서울 감옥에서 병을 얻어 서거했다. 당시 빛나는 의거에 주동이었던 김정오, 김순 선생의 산 증언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신 분 중 생존하신 이갑성 선생의 휘호를 이 비에 새기게 됨을 감명 깊에 생각하며 가신 어른들의 애국 충혼이 길이길이 조국을 수호하시리라.
서기 1976년 8월 15일
서기 1976년 8월 15일
위대한 사랑의 횃불이어!
적의 총검 앞에서도 조국 독립 만세를
목청껏 부르짖던 그 의기 그 순정
죽음을 초월한 그날의 애국 애족의
뜨거운 충정은 우리 겨레의 핏줄 속에
영원히 이어져 살아 있다.
박목월
적의 총검 앞에서도 조국 독립 만세를
목청껏 부르짖던 그 의기 그 순정
죽음을 초월한 그날의 애국 애족의
뜨거운 충정은 우리 겨레의 핏줄 속에
영원히 이어져 살아 있다.
박목월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산111-1 3.1 독립운동 기념비(연개장터만세운동)
3.1독립운동기념비
3.1독립운동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