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이기동 9
- 탐방로그
- 동해시 이기동 9 이기교옆 밭에 있었던 장준하 새긴돌, 장준하선생 추모시비 안내판을 찾았다. 본래 과수원과 밭이었는데 주차장으로 바뀌고, 새긴돌과 시비가 세워졌다. 장준하 선생의 아드님이 새로운 광복회장에 당선되신 직후 이곳을 다녀가셨다고 한다. 장준하 새긴돌 뒷면에는 장준하 선생 약력이 새겨져 있는데, 아래부분은 훼손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장준하선생 약력이 새겨져 있는데, 아래부분은 훼손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장준하선생 약력
장준하 선생은 단기 4251년(1918) 8월 27일 (음력)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셨으며 젊은 날에는 독립군 대위로 일제와 싸우셨다. 8.15해방 .....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를 역임 .....박정희 군사 독재와 싸우시다....고비인 단기 4308년(1975) .....밀려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 선생은 ... 일찌기 모든 .... 은 좋다이요 ...한섬으로써 분단 .... 이요 따....락과의 ... 사의 전....
....
장준하 선생은 단기 4251년(1918) 8월 27일 (음력)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셨으며 젊은 날에는 독립군 대위로 일제와 싸우셨다. 8.15해방 .....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를 역임 .....박정희 군사 독재와 싸우시다....고비인 단기 4308년(1975) .....밀려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 선생은 ... 일찌기 모든 .... 은 좋다이요 ...한섬으로써 분단 .... 이요 따....락과의 ... 사의 전....
....
오늘도 밤이슬 이렇게 흠빡 젖은건 외세의 반역이 내리친 벽을 새도록 까부신 피눈물인줄 왜들 모르나
벗이여 나의 비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민족해방 통일이라. 이곳 땅밑에서도 이가 갈리는 분단의 원흉은 그 누구도 용서하지말라
하지만 통일은 딴데 있는게 아니다. 우리의 삶속에 마디마디 박힌 바로 그 싸움의 현장에서 통일을 찾으라
그리하여 쓰러진 전사는 무덤이 아니라 저 들판을 일으키는 잠들지 못하나니
벗이여 이 불길 나는 듯 봉우리마다 이어 붙여라. 노여운 아우성으로
저 간악한 것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통일 신바람 통일 신바람으로 한꺼번에 한꺼번에 몰아처라
XXX XX
벗이여 나의 비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민족해방 통일이라. 이곳 땅밑에서도 이가 갈리는 분단의 원흉은 그 누구도 용서하지말라
하지만 통일은 딴데 있는게 아니다. 우리의 삶속에 마디마디 박힌 바로 그 싸움의 현장에서 통일을 찾으라
그리하여 쓰러진 전사는 무덤이 아니라 저 들판을 일으키는 잠들지 못하나니
벗이여 이 불길 나는 듯 봉우리마다 이어 붙여라. 노여운 아우성으로
저 간악한 것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통일 신바람 통일 신바람으로 한꺼번에 한꺼번에 몰아처라
XXX XX
누군가가 마지막 장준하 선생의 이음을 정으로 쪼아 훼손을 했다.
동해시 이기동 9 이기교옆 밭에 있었던 장준하 새긴돌, 장준하선생 추모시비에 안내판이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아가고 있다.
장준하 선생 새긴돌 통일시비 안내판 설치
평화시대 통일의 관문 동해시
장준하 선생 새긴돌 통일시비 안내판 설치
평화시대 통일의 관문 동해시
장준하선생 새긴돌 통일시비 안내판 설치
장준하선생(張俊河, 1918 ~ 1975)
장준하선생(張俊河, 1918 ~ 1975)
새긴돌
장준하선생은 단기 4251년(1918) 8월 27일(음력)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셨으며 젊은 날에는 독립군 대위로 일제와 싸우셨다. 8.15해방 이후에는 한때 백범 선생의 비서을 역임하시고 이승만 독재, 박정희 군사독재와 싸우시다가 그 싸움의 결정적 고비인 단기 4308년(1975) 8월 17일 유신정권(박정희정권)으로부터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원통하게도 암살 당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모든 통일은 좋은가, 모든 통일은 좋다고 하심으로써 분단은 제국주의의 침략이요, 따라서 분단침략과의 싸움, 통일만이 민족사의 전진임을 설파하셨다. 통일운동 45년 6월 30일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대표)
통일 시비(詩碑)가 왜 이곳에
1989년 6월 30일 통일의 길목인 파주시 장곡리 검문소 앞에 세워졌으나 2007년 강원도 동해시 백두대간 더받이령 자락 노나메기 마실터 부지로 옮겨왔다. 왜 이곳에 왔는가? 동해시 동점, 귀터(현 이기리)로 그냥온게 아니다. 시비는 우리가 모셔온 것이 아니라 시비가 여기를 찾아온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혼령이 백두산에서 범이 내리 달리는 길목 백두대간의 중심에 찾아온 것이다. 동해는 삼화사 천년고찰이 있고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있고 조선건국신화가 있고 임진왜란때 오천여명이 목숨을 바쳐 지킨 두타산성 전투가 있는 애국심이 발로되는 나라사랑 교육 현장이다. 산자가 따라야 할 장준하선생의 통일 애국심이 담긴 시비야말로 마땅히 있을 곳을 찾아온 것이다.
새긴돌
장준하선생은 단기 4251년(1918) 8월 27일(음력)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셨으며 젊은 날에는 독립군 대위로 일제와 싸우셨다. 8.15해방 이후에는 한때 백범 선생의 비서을 역임하시고 이승만 독재, 박정희 군사독재와 싸우시다가 그 싸움의 결정적 고비인 단기 4308년(1975) 8월 17일 유신정권(박정희정권)으로부터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원통하게도 암살 당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모든 통일은 좋은가, 모든 통일은 좋다고 하심으로써 분단은 제국주의의 침략이요, 따라서 분단침략과의 싸움, 통일만이 민족사의 전진임을 설파하셨다. 통일운동 45년 6월 30일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대표)
통일 시비(詩碑)가 왜 이곳에
1989년 6월 30일 통일의 길목인 파주시 장곡리 검문소 앞에 세워졌으나 2007년 강원도 동해시 백두대간 더받이령 자락 노나메기 마실터 부지로 옮겨왔다. 왜 이곳에 왔는가? 동해시 동점, 귀터(현 이기리)로 그냥온게 아니다. 시비는 우리가 모셔온 것이 아니라 시비가 여기를 찾아온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혼령이 백두산에서 범이 내리 달리는 길목 백두대간의 중심에 찾아온 것이다. 동해는 삼화사 천년고찰이 있고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있고 조선건국신화가 있고 임진왜란때 오천여명이 목숨을 바쳐 지킨 두타산성 전투가 있는 애국심이 발로되는 나라사랑 교육 현장이다. 산자가 따라야 할 장준하선생의 통일 애국심이 담긴 시비야말로 마땅히 있을 곳을 찾아온 것이다.
장준하 새긴돌
장준하 새긴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