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산105-1
- 탐방로그
-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595 애국지사 안재원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함안군의 안내판 주소는 전혀 맞지가 않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산105-1이다. 선생의 묘소를 찾아갈 때 유념하면 좋을 것 같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595 애국지사 안재원선생의 묘.
그런데 이상하게 함안군의 안내판 주소는 전혀 맞지가 않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산105-1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함안군의 안내판 주소는 전혀 맞지가 않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산105-1이다.
義士 竹巖 順興安公 在遠 之墓(의사 죽암 순흥안공 재원 지묘)
동방의 정학을 수창하신 문성공 안유 회헌 선생의 후예이신 순흥 안재원 공의 초휘는 교삼 자는 희옥 호는 죽암이라 하시고 1891년 9월 25일에 태어나시었다. 어려서부터 촘명재질이 과인하여 학문이 ○○하셨다. 때에 왜인의 가혹한 정치는 날이갈수록 그 도를 더하여 압박은 극도에 달하였다. 1919년(기미) 3월 1일을 기하여 전국에 일어난 독립만세의 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동년 3월 19일 함안읍내 시일을
기하여 공을 위시한 몇몇 동지는 약 2000여의 군민을 이끌고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가 부르면서 만세를 외쳤다. 노도처럼 밀어닥처 경찰서를 처부수고 군수를 끌어내었다. 이로 인하여 왜경에 체포되고 2년 징역의 언도를 받아 영어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공의 나이는 창창 29세 피끓는 젊음을 조국을 위해 바쳤다. 그후 왜경의 압박이 심하여 중국에 망명하셨다가 광복과 더부러 귀국하셨다. 일본에 건너가셔서 우거하든 중 고국에 돌아오시지 못하고 1961년 7월 6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70세였다. 근자 공의 유해는 자손의 따뜻한 손에 의하여 말없이 고구에 돌아와 고원에 묻혔다. 이제 꿈에도 잊지 못하였든 조국광복 투쟁 이력을 일편석에 새겨 후세에 전하다. 공의 배위는 전주이씨 효령대군 후예로서 부덕이 있었고 참서면재의 녀이시며 자에 진호 영진 형호 문호 여서에 경주 최기홍 손에 공용 문용 길성 조웅 민웅 외손이 황구이다.
태극기 높이들고 독립노래 부르면서
태극기 높이들고 독립노래 부르면서
애국정신 들어내어 조국 위해 싸우셨네
혁혁하신 공의 이름 일월같이 감싸주네
여항산 지켜주고 남강물 감싸주네
1974년(갑인) 10월 8일
함안후인 조성래 찬
해주후인 오창근 서
후원 함안군수 한영규
혁혁하신 공의 이름 일월같이 감싸주네
여항산 지켜주고 남강물 감싸주네
1974년(갑인) 10월 8일
함안후인 조성래 찬
해주후인 오창근 서
후원 함안군수 한영규
愛國志士 竹巖 安在遠 墓 配 孺人 全州李氏 祔左(애국지사 죽암 안재원 묘 배 유인 전주이씨 부좌)
공의 휘는 재원이요. 성은 안이요. 호는 죽암이시다. 관향은 순흥으로 문성공 회헌 선생 21대손이요. 임란 때 수훈을 세우신 죽계공의 후이며 사은 성섭공과 안악이씨 재순공의 따님 사이에서 4형제 중 3위로 신묘 9월 25일에 사릉마을에서 태어나셨다. 8세때에 한문서숙에 입학했는데 재지가 출중하고 성격이 과감하며 이념이 견고하므로 부노들의 기망이 크고 제배들의 추중한 바 되었다. 통한의 경술국치를 당하사 백헌 이중건 공을 도아 동명학교를 창설하여서 자신이 교사가 되어 후진교육에 이바지 하면서 애국과 배일사상을 고취하셨다. 공동 저축사도 조직하여 경제자립정신을 도모하기로 했으며 극밀로 해외 독립운동에 보태기도 했다. 18세에 효령대군 후손인 전주이삼서 면재공의 따님을 맞이하니 현철하고 부덕이 있어 풍운남아의 반려자로서 현모양처의 고
교대로이였은데 슬하에 4남을 두어 장은 진호 차는 영호 형호 문호이였다. 서기 1919년 기미에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지자 이는 백의민족의 정기를 세계만방에 떨친 것인데 국내는 물론이요. 국외에도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곳이라면 봉기되어 적수공권으로 살벌한 총인에 항거했으니 얼마나 장렬한 일이였든가. 우리 함안에서도 3월 19일 시일을 기해 정오에 우봉 안지호 중형 도남 재형 종제 백산 재성 국암 안재휘 백천 이희석 이종찬 조용환 한종순 등 동지들과 숙의를 거덥하여 거사를 했다. 태평루 앞에서 2천여 군중을 지휘하여 선두 1인으로 과감이도 왜정의 관리들을 몰아내고 기관들을 파괴하며 문서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왜경에게 체포되어 마산감옥에 수감되었다. 당년 29세의 열혈남아로서 일편단심 애족애국뿐이였다. 포연탄이가 두려울리 없다. 고문이 심하면 심할수록 반사적으로 저항도 강했다. 이로서 유인하고 멸로서 협박해도 백절불굴의 동요없이 늠늠하여 종시일관했으니 흉중에 함양되어 있는 정기를 알 수 있다. 대구고등법원에서 2년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옥햇는데 고문으로 받은 여독으로 거이 반신불수였으며 왜관의 감시가 심했으나 초지에 변함없이 조국광복의 이념으로 신미년에 종제 재성공과 같이 국외로 탈출하여 상해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셨다. 고향에서 모친과 형이 별세하셨다는 것을 듯고 을해년에 일시 귀국하셨는데 생계를 위하여 일본에 가서 있는 진호 형제의 주선과 갖여있는 포부로서 도일했다가 을유년에 광복의 숙원이 풀렸으나 환희도 다 못한 채 1961년 신축 7월 6일에 향년 70세로 별세하셨는데 갑인 10월 8일에 반장되어 사릉리 오도봉 해좌로 배위와 합분이시다. 1977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의 포상을 받았는데 1983년에 경남지사와 함안군수가 묘역을 정화하게 하니 그 뜻을 같이 하며 돌을 세워 행적의 제일을 기록한다.
파란만장 그 행적을 붓으로 다 하리오만
파란만장 그 행적을 붓으로 다 하리오만
후인들의 정성이오니 고이 받으소서
오도봉 봉오리 같은 애족애국 그 뜻이여
구천에서도 그르려니 이 민족을 보살피옵소
서기 1983년 계해 11월 일
족손 창준 짓고 함안 조광제 씀
경상남도지사 함안군수 세움
오도봉 봉오리 같은 애족애국 그 뜻이여
구천에서도 그르려니 이 민족을 보살피옵소
서기 1983년 계해 11월 일
족손 창준 짓고 함안 조광제 씀
경상남도지사 함안군수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