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형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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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57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571-1 도남 안재형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道南 安在瑩 先生 追慕碑(도남 안재형 선생 추모비)
기미년 3.1운동은 왜적에게 국권을 빼앗긴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일대의거이였다. 당시 서울을 위시한 전국각지에서 의거의 함성이 터져나왔는데 우리 고을 함안읍에서도 지사 도남 안재형 공이 민중의 선두에 서서 감연히 분기했던 것이다. 공은 품성이 강직하고 기개가 강개하여 조년에 경서를 두루 읽고 향내의 망사가 되었다. 공은 애국심이 남보다 강열하여 국세의 쇠퇴함을 보고 늘 걱정하고 있었는데 경술년 국치 당시에는 고을의 유생들과 함께 국사의 앞날을 비탄하는 상소를 했으며 기미년 정월에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니 공은 통곡하면서 나라가 망하고 군주마저 별세한 지금 내가 산들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는 칼을 뽑아 자결을 하려고 했으나 친우 이연건님의 제지로 그만 그치고 말았다. 이 해 3월 고종의 인산을 계기로 민족의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독립을 선언할 때 인산 참례차 상경했던 종제 재위님이 중앙의 지시를 받
고 비밀히 선언문을 간직하고 돌아와 공에게 알리니 공은 즉시 향내의 동지를 규합하여 3월 19일 함안읍 장날에 의거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즉 이날 공이 수천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 시위하면서 적치의 각종 기관을 파괴하는 일대의거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에 놀란 왜적은 군대를 놓아 시위군중을 발포 저지시키고 관련인물 60여명을 검거 투옥시켰다. 공은 마산법원에서 고문하는 왜적의 관리에게 사기가 늠름하여 큰 소리로 꾸짖기를 우리 한국은 사천년 예의의 나라로서 너희들 개 돼지의 치욕을 받은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우리 2000만 민족의 정의의 피가 끓고 있는데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겠는가. 나는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다 하면서 꾸짖는 소리가 그치지 아니했다. 수월 후에 대구고등법원으로 옮겨져서 3년 선고를 받아 대구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후 풀려나왔다. 공은 그 후에도 신간회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맹 안재홍 홍명희님을 위시한 많은 우국지사와 조국광복에 헌신진력했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마침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기 1935년 을해 음 5월 9일에 향년 54세로서 일생을 마쳤는데 지난 서기 1977년도에 정부에서 공을 국가독립유공자로 표창하였다. 아아 조국이 광복된 지 어느듯 37년 왜적이 다시 우리 민족에게 모멸을 가하고 남북의 통일을 온 민족이 갈망하는 이때 공의 민족을 위한 자주독립정신은 우리들의 귀감이 될만 하므로 국가에서 묘비를 수립하였고 유지인사들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향 후배인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에 공의 의거에 관한 문적을 소고하여 위와 같이 약술한다. 공의 휘는 재형 자는 희숙 호는 도남이며 본관은 순흥이니 시조는 고려 상호군 자미이고 현조는 문성공 회헌 선생 유인데 공의 21대조이다. 죽계 선생의 휘는 희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나고 임진란에 창의하여 공을 세웠으니 공의 11대조이다. 고의 휘는 기열이고 비는 선산김씨이며 본 생고는 성섭이고 비
는 안악이씨이니 서기 1882년 임오 음 6월 28일에 공을 여항면 외암리에서 나왔었다. 배위는 밀양박씨 문황의 따님이며 남은 인호 정호이고 녀는 조용기 이필건 전용혁이다. 끝에 명을 지어 공의 의거정신을 기린다.
천길 파산은 반공중에 우뚝 솟고 십리 대천은 즐기차게 흐르는데 의거에 앞장선 그 기개 그 정신이 고장 후인에게 길이 전승하리.
서기 1982년 임술 8월 일
향 후배 교수 재령 이재호 짓고 제주 창남 고동주 쓰고
도남 안선생 기념사업회가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