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혁중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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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주물리 산37-2
탐방로그
후손되시는 안홍준 개발위원장께서 직접 묘소를 안내해 주셨다.

상석 뒤쪽에는 초기의 묘비가 서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안혁중(安赫中)의 묘(이명 : 안승학 / 安昇鶴)
. 출생지 : 경남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730
. 사망지 : 대구 형무소
. 생몰시기 : 1879년 5월 14일 ~ 1919년 9월 22일
. 공적사항 : 1919년 3월 19일 함안군 함안읍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 주재소, 등기소, 우편소, 일본인소학교를 차례로 파괴하고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어 1919년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3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
. 기타특기사항 : 1919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1996년 12월 함안군수
애국지사 안혁중 선생 묘지
(위치 : 함안군 법수면 주물리 산 37-2번지)
1㎞ 전방
상석 뒤쪽에는 초기의 묘비가 서 있었다.
安赫中 之墓(안혁중 지묘)
開國 五百四十九年 四月 日(개국 549년 4월 일)
咸安靑年團(함안청년단)
愛國志士 松岩 安赫中 之墓(애국지사 송암 안혁중 지묘)
공의 휘는 혁중 호는 송암 자는 응장으로 순흥안씨이다. 고려의 상호군 휘 자미의 후손이니 현조는 문정공 근제 선생 향소수서원 휘 축이요 행 도호부사 휘 해의 14세손이며 휘 탁 호 선우정 관 어모 장군의 12세손이다. 고조의 휘는 사인 증조의 휘는 철 호는 송계 조의 휘는 상규니 호는 신재다. 생고의 휘는 세열 호는 만지당이라. 생비 현풍곽씨 사이의 4형제로 백형 항중 제는 치중 차제 가중이니 4형제중 둘째로 서기 1880년 경진5월14일에 공은 가야면 검암리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백부 의열 호는 죽와전 출계하였으며 비는 상주 조
씨 희원의 여이다. 공은 자질이 순후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지기가 강개하고 사리에 통달하였다. 약관에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심히 개탄하자 경술합방의 치욕을 당한 후로 더욱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여 국권회복의 길을 논의 모색하던 중 1919년 기미독립의거운동이 서울로부터 전개되자 공은 이에 호응하여 동지를 초치하여 태극기 및 대한독립가 각 수천매를 제작하여 각처 동지들에 전달함과 동시에 방방곡곡을 암행하면서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음 2월 18일 함안읍 시일을 기하여 밀약되었던 동지들과 합세하여 사방에서 운집한 의거 군중에게 공은 선두에서 만세와 독립가를 고창하면서 시중을 행진하니 그 위세는 태극기의 물결과 더불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 하였다. 공은 이어서 군중과 함께 각 관공서를 점거하고 유치 중인 동지들을 구출하며 군수 서장 등을 포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자창케하였으니 참으로 장엄한 의거였다. 그럴 즈음 마산에서 파견된 왜병에 의하여 공은 현장에서 피체되니 마산헌병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대구복심법원에서 3년 실형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1919년 9월 22일에 원통하게도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하였다. 이 어찌 동족으로 비통한 일이 아니리오. 공의 유해는 함안 법수 사평동 좌편등에 반장되었는데 그 운상의 경위는 대구에서 영산까지는 대구청년단에서 영산에서 함안까지는 함안청년단에서 자진운구했으니 공의 장렬하고 값진 희생을 증함이로다.
당시 함안청년단에서 단갈 한 좌를 세웠는데 행적은 전연 기재되지 않았으니 왜정하에 부득기한 처사임을 다시금 통탄할 따름이로다. 공의 배위는 함안조씨 갑의 녀이니 묘는 공과 합폄이고 3남을 두었으니 상복 상을 상로요 상복의 남은 명준 동준 성태 상을의 남은 원태 형태다. 슬프다 공이 가신지 60성상이 되었도다. 공의 장엄한 풍절과 처절한 역로는 후인들로 하여금 흠앙하며 비분케 하도다. 공은 비록 갔으나 공의 방명은 길이 민족의 가슴에 새겨져 있으리라.
1982년 임술 10월 일 설립자 경상남도지사 함안군수
함안군 법수면 주물리 251-3 애국지사 안혁중(안승학)의 묘소 안내판을 찾아왔다.
애국지사 안혁중(安赫中)의 묘(이명 : 안승학 / 安昇鶴)
. 출생지 : 경남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730
. 사망지 : 대구 형무소
. 생몰시기 : 1879년 5월 14일 ~ 1919년 9월 22일
. 공적사항 : 1919년 3월 19일 함안군 함안읍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 주재소, 등기소, 우편소, 일본인소학교를 차례로 파괴하고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어 1919년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3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
. 기타특기사항 : 1919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1996년 12월 함안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