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14-1
- 탐방로그
- 강원도 항일애국선열 추모탑은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14-1에 있다. 소양댐 시민의 숲 반대편에 위치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追慕塔의 象徵(추모탑의 상징)
무릇 반세기 (1894~1945)에 걸쳐 조국광복을 위한 한국독립운동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고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제 한말의병(1894~1915)은 우리 독립운동사상 그 서두를 장식하면서 이후에 전개된 모든 독립운동을 불러 일으킨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순국정신과 전통은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승화 계승되었다. 백암 박은식은 그의 '혈사'에서 의병은 민병으로 우리 민족의 국졸이다. 무기가 없을지라도 순국할 뜻을 결연히 세우고 맨주먹으로 칼날을 무릅써 뇌장과 살갗은 창끝과 살촉에 발라지면서도 조금도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하였거니와 망국에 처하여 의병들이 지닌 결사구국의 결의가 그 얼마나 고귀하였던가. 당한 통사에서 대항한 혈사로 이겨낸 한말의병의 위대한 모습이 얼마나 숭고하였음인가. 또한 의암 유인석은 '격문'에서 화가 복이 되건 죽엄을 약속하고 지킬 따름이이니 말피를 입에 바르고 함께 맹서함에 승패와 이둔은 예측할 바 아니다'라고 하였듯이 그들은 성공과 실패는 애당초 헤아리지 않았고, 兵은 패할지라도 義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위정척사적 신념과 용솟음치는 우국애정에서 눌러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이에 의병들은 책을 덮고 갓을 벗어 서투른 손에 창검을 들면서 역사의 노도 탁랑 속으로 뛰어든 것이고, 흔연히 민족혼의 부름에 오직 순국으로 응답하고자 하였으니 그 기개가 얼마나 장열함이며, 어찌 그 순국대의 앞에 감흡함이 없을 소냐. 그러므로 광복의 성전에 쓰러진 의병선열의 피맺힌 위훈을 오늘에 기리면서 글자 위에 실어 추념하고자 함이다.
3.1운동은 한국민족사상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이었고, 가장 숭엄한 한민족의 표상이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녀온 동방의 백의민족, 우리 겨레가 국치이래 국혼의 불멸을 자증하여 한국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날이 1919년 3월 1일이요, 삼천리 방방곡곡에 청혈이 흐르고 생육이 찢어지던 그날의 민족적 거사가 바로 기미년3.1운동이었다. 그러기에 그 때 그 결심이 비장치 않을 수 없었으며, 다져진 민족정기에서 우러난 독립운동이었기에 그 기개가 장엄치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민족의 굴욕은 죽엄볻 오히려 참기 어려웠고, 자유의 희원은 생명보다 차라리 소중하였거늘, 시위중에 흘린 겨레의 핏자국은 필경 역사의 흔적으로 기억될 것이며, 폭악한 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힌 국치민욕은 민족의 형극으로 새겨두리라.
을사년 대욕은 당하여 위암 장지연은 '시일에 방성대곡한다'하였거니와 헌병경찰통치의 참고에 혈루어린 곡성은 민족의 골수에 그 얼마나 사무쳤던가. 그래서 망국으로 암울했던 역사의 질곡에서 광복에로 역사의 수레를 밀고 간 선인들이 몸짓이 곧 3.1운동이었고, 민족의 앞날을 선도한 지로탑의 역사를 3.1운동이 해낸 것이 아니던가. 참으로 3.1운동은 지울 수 없는 민족의 이정표가 되었고, 잊을 수 없는 민족의 피발림 그대로 빛나는 십자가요, 민족의 부활이며, 생명이 되었나니, 이제 박해와 치욕의 역사를 씻어준 3.1운동으로 영원히 각명할 것이니라. 인류평등의 대의를 천하에 극명하고 민족자존의 주권을 영겁토록 향유하는 그날의 3.1정신에서 상실된 국통이 상해망명정부 수립으로 소생되었고 인류공존의 특권을 전취하고자 결의한 그날의 3.1정신에서 아시아 약소국가의 민족운동과 저할운동의 선구가 되었거널 3.1운동이야말로 세계사적 의의를 아울러 지닌 겨레의 금자탑이 아니랴. 이에 우리는 위대한 3.1운동을 현계하며 영원불멸의 민족적 3.1운동을 승리의 역사로 빛내고자 함이다.
우리 민족은 역사상 어떠한 침략과 억압 속에서도 유순○약한 굴종으로 나라를 보전하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일제가 침략전쟁(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감행하는 동시에 이 땅을 군수병참기지화 하면서 물력(공출미 등)과 인력(징용, 학병, 징병, 정신대) 동원에 광분할 적에 또한 민족말살을 꾀하여 한민족을 노예화하고 경제적 수칼과 황국신민화를 노골화할 때에, 우리 선인들은 무력투쟁과 의열투쟁 그리고 문화(정신)투쟁으로 대결하여 피를 뿜는 혈전을 벌이는가 하면, 쓸개 씹으면서 조국광복에 헌신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국외에서는 망명정부를 세워 국통을 이어갔고, 국내에서는 언론, 종료,교육,학술,예술 등의 문화투쟁을 통하여 민족행의 수레바퀴를 바르게 이끌어 가기에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지사들은 피끓는 필진을 휘둘러 민족정기를 일깨우고 민족의 얼을 살리며 민족의 단결을 도모하는가 하면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시켜 대일전쟁에 박차를 가하는 얼론투쟁을 펼쳤다. 자유.평등.정의.양심을 신조로 한 종교단체의 독립투쟁의 본거지가 되었고, 신앙인의 의기와 용기는 밀제의 총칼 앞에서 비굴함이 없이 종교투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또 사학을 세워, 신예투사로 양성한 그들이 바로 독립운동의 기수요, 핵심적 전위대로서 항일투쟁(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비밀결사 등)을 전개하였으니, 이것이 곧 교육투쟁의 소산이 아니랴. 한편 민족의 얼이 담긴 우리 역사를 뒤지고 피와 혼이 서린 내말과 내글을 바로 다듬어서 민족투쟁의 저력을 길러낸 학술투쟁이 하며 시와 음악으로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고 애국정열의 붓으로 피를 찍어 글을 짓던 지사들의 예술투쟁은 민족투쟁의 일환으로 전개한 문화투쟁이 아니던가. 이에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문화투쟁을 전개한 선인들의 항일정신과 민족정기를 오늘에 되살려 조국통일의 의지로 다지려 함이다.
무릇 반세기 (1894~1945)에 걸쳐 조국광복을 위한 한국독립운동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고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제 한말의병(1894~1915)은 우리 독립운동사상 그 서두를 장식하면서 이후에 전개된 모든 독립운동을 불러 일으킨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순국정신과 전통은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승화 계승되었다. 백암 박은식은 그의 '혈사'에서 의병은 민병으로 우리 민족의 국졸이다. 무기가 없을지라도 순국할 뜻을 결연히 세우고 맨주먹으로 칼날을 무릅써 뇌장과 살갗은 창끝과 살촉에 발라지면서도 조금도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하였거니와 망국에 처하여 의병들이 지닌 결사구국의 결의가 그 얼마나 고귀하였던가. 당한 통사에서 대항한 혈사로 이겨낸 한말의병의 위대한 모습이 얼마나 숭고하였음인가. 또한 의암 유인석은 '격문'에서 화가 복이 되건 죽엄을 약속하고 지킬 따름이이니 말피를 입에 바르고 함께 맹서함에 승패와 이둔은 예측할 바 아니다'라고 하였듯이 그들은 성공과 실패는 애당초 헤아리지 않았고, 兵은 패할지라도 義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위정척사적 신념과 용솟음치는 우국애정에서 눌러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이에 의병들은 책을 덮고 갓을 벗어 서투른 손에 창검을 들면서 역사의 노도 탁랑 속으로 뛰어든 것이고, 흔연히 민족혼의 부름에 오직 순국으로 응답하고자 하였으니 그 기개가 얼마나 장열함이며, 어찌 그 순국대의 앞에 감흡함이 없을 소냐. 그러므로 광복의 성전에 쓰러진 의병선열의 피맺힌 위훈을 오늘에 기리면서 글자 위에 실어 추념하고자 함이다.
3.1운동은 한국민족사상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이었고, 가장 숭엄한 한민족의 표상이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녀온 동방의 백의민족, 우리 겨레가 국치이래 국혼의 불멸을 자증하여 한국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날이 1919년 3월 1일이요, 삼천리 방방곡곡에 청혈이 흐르고 생육이 찢어지던 그날의 민족적 거사가 바로 기미년3.1운동이었다. 그러기에 그 때 그 결심이 비장치 않을 수 없었으며, 다져진 민족정기에서 우러난 독립운동이었기에 그 기개가 장엄치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민족의 굴욕은 죽엄볻 오히려 참기 어려웠고, 자유의 희원은 생명보다 차라리 소중하였거늘, 시위중에 흘린 겨레의 핏자국은 필경 역사의 흔적으로 기억될 것이며, 폭악한 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힌 국치민욕은 민족의 형극으로 새겨두리라.
을사년 대욕은 당하여 위암 장지연은 '시일에 방성대곡한다'하였거니와 헌병경찰통치의 참고에 혈루어린 곡성은 민족의 골수에 그 얼마나 사무쳤던가. 그래서 망국으로 암울했던 역사의 질곡에서 광복에로 역사의 수레를 밀고 간 선인들이 몸짓이 곧 3.1운동이었고, 민족의 앞날을 선도한 지로탑의 역사를 3.1운동이 해낸 것이 아니던가. 참으로 3.1운동은 지울 수 없는 민족의 이정표가 되었고, 잊을 수 없는 민족의 피발림 그대로 빛나는 십자가요, 민족의 부활이며, 생명이 되었나니, 이제 박해와 치욕의 역사를 씻어준 3.1운동으로 영원히 각명할 것이니라. 인류평등의 대의를 천하에 극명하고 민족자존의 주권을 영겁토록 향유하는 그날의 3.1정신에서 상실된 국통이 상해망명정부 수립으로 소생되었고 인류공존의 특권을 전취하고자 결의한 그날의 3.1정신에서 아시아 약소국가의 민족운동과 저할운동의 선구가 되었거널 3.1운동이야말로 세계사적 의의를 아울러 지닌 겨레의 금자탑이 아니랴. 이에 우리는 위대한 3.1운동을 현계하며 영원불멸의 민족적 3.1운동을 승리의 역사로 빛내고자 함이다.
우리 민족은 역사상 어떠한 침략과 억압 속에서도 유순○약한 굴종으로 나라를 보전하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일제가 침략전쟁(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감행하는 동시에 이 땅을 군수병참기지화 하면서 물력(공출미 등)과 인력(징용, 학병, 징병, 정신대) 동원에 광분할 적에 또한 민족말살을 꾀하여 한민족을 노예화하고 경제적 수칼과 황국신민화를 노골화할 때에, 우리 선인들은 무력투쟁과 의열투쟁 그리고 문화(정신)투쟁으로 대결하여 피를 뿜는 혈전을 벌이는가 하면, 쓸개 씹으면서 조국광복에 헌신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국외에서는 망명정부를 세워 국통을 이어갔고, 국내에서는 언론, 종료,교육,학술,예술 등의 문화투쟁을 통하여 민족행의 수레바퀴를 바르게 이끌어 가기에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지사들은 피끓는 필진을 휘둘러 민족정기를 일깨우고 민족의 얼을 살리며 민족의 단결을 도모하는가 하면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시켜 대일전쟁에 박차를 가하는 얼론투쟁을 펼쳤다. 자유.평등.정의.양심을 신조로 한 종교단체의 독립투쟁의 본거지가 되었고, 신앙인의 의기와 용기는 밀제의 총칼 앞에서 비굴함이 없이 종교투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또 사학을 세워, 신예투사로 양성한 그들이 바로 독립운동의 기수요, 핵심적 전위대로서 항일투쟁(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비밀결사 등)을 전개하였으니, 이것이 곧 교육투쟁의 소산이 아니랴. 한편 민족의 얼이 담긴 우리 역사를 뒤지고 피와 혼이 서린 내말과 내글을 바로 다듬어서 민족투쟁의 저력을 길러낸 학술투쟁이 하며 시와 음악으로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고 애국정열의 붓으로 피를 찍어 글을 짓던 지사들의 예술투쟁은 민족투쟁의 일환으로 전개한 문화투쟁이 아니던가. 이에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문화투쟁을 전개한 선인들의 항일정신과 민족정기를 오늘에 되살려 조국통일의 의지로 다지려 함이다.
독립선언서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5천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누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공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인들 꺾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여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물리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심에 희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로운,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의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인 4억만 지나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움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봄이 온 세계에 들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공약 3삼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하나,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5천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누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공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인들 꺾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여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물리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심에 희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로운,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의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인 4억만 지나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움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봄이 온 세계에 들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공약 3삼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하나,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건립개요
약사 지은이 :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구용
제작 : 강원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이윤식
서예가 : 강원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황재
사업비 지원 : 강원도
후원: 국가보훈처 광복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건립 주관 : 광복회 강원도지부 지부장 류연익 사무국장 권희동, 과장 정종숙
건립 위치 : 강원도 춘천시 중도동 603번지 (하중도일 128)
건립일자 : 1995년 8월 15일
이전개요
이전 사유 : 중도 레고랜드 사업으로 인해 추모탑 이전
약사 한글편집 : 의암학회 이사장 문학박사 엄찬호 이전비 지원 : 강원도
이전 주관 : 광복회 강원도지부 지부장 이종호 사무국장 이찬해, 과장 정종수
이전공사업체 : 불이석재, (합)거산, 동아전력공사 (주)진성, (주)강토개발
이전 일자 : 착공 2020년 9월 21일, 완공 2021년 4월 11일
약사 지은이 :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구용
제작 : 강원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이윤식
서예가 : 강원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황재
사업비 지원 : 강원도
후원: 국가보훈처 광복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건립 주관 : 광복회 강원도지부 지부장 류연익 사무국장 권희동, 과장 정종숙
건립 위치 : 강원도 춘천시 중도동 603번지 (하중도일 128)
건립일자 : 1995년 8월 15일
이전개요
이전 사유 : 중도 레고랜드 사업으로 인해 추모탑 이전
약사 한글편집 : 의암학회 이사장 문학박사 엄찬호 이전비 지원 : 강원도
이전 주관 : 광복회 강원도지부 지부장 이종호 사무국장 이찬해, 과장 정종수
이전공사업체 : 불이석재, (합)거산, 동아전력공사 (주)진성, (주)강토개발
이전 일자 : 착공 2020년 9월 21일, 완공 2021년 4월 11일
진관사 태극기
2009년 5월 27일 서울 진관사 칠성각 해체·복원 공사 도중 3.1운동 관련 문건과 함께 발견되어 "진관사 태극기"로 불리게 되었다. 독립의지를 다지기 위해 일장기에 덧칠하여 태극 문양을 만들고 사괘를 그려 넣었다. 광복회가 고증을 통해 복제하였다.
2009년 5월 27일 서울 진관사 칠성각 해체·복원 공사 도중 3.1운동 관련 문건과 함께 발견되어 "진관사 태극기"로 불리게 되었다. 독립의지를 다지기 위해 일장기에 덧칠하여 태극 문양을 만들고 사괘를 그려 넣었다. 광복회가 고증을 통해 복제하였다.
임시의정원 태극기
1923년 제작되어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게양된 태극기다. 2008년 8월 12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95-1호로 지정되어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장과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김봉준과 그의 아내 노영재가 제작하였다.
1923년 제작되어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게양된 태극기다. 2008년 8월 12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95-1호로 지정되어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장과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김봉준과 그의 아내 노영재가 제작하였다.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약사(江原道 抗日獨立運動略史)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약사(江原道 抗日獨立運動略史)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1894년 광복이 되기까지 반세기 걸쳐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치열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 시기 강원도 등 광복이 될 때까지 끈질기게 대일항쟁을 펼쳤다.한말의병은 갑오의병(1894), 을미의병(1895),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1907)으로 이어지면서 전환기의병(1909)이 종식되는 1915년 전후 약 20년동안 대일 구국항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강원도의병은 갑오의병에서부터 전항쟁기를 통하여 '피의 항쟁'을 펼쳤다. 원래 강원도 지역은 한말의병의 진원지였고 웅거지였다. 강원의병은 화서 이항로의 척사이념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이 이끌었으며, 산포수가 많아 싸움 기술이 뛰어났고, 산악지대라 장기전과 유격전을 펼치는데 이점이 많았다. 여기에 무기 제조장을 설치하여 스스로 화약과 무기를 만들어 만들어 사용하게 되면서 다른 지역보다 활발하게 의병활쟁 활동이 전개되었다.
전기의병은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과 친일내각이 강행한 단발령 시행으로 인하여, 위정척사사장이 투철한 유림들이 주도하여, 국수보복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다. 이때 강원도의병은 영서 북부지역에서 이소응의 춘천의병, 영서 남부지역에서 류인석의 호좌의병 그리고 영동지역에서 민용호의 관동의병이었다. 1896년 1월 20일에 기병한 춘천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 처음으로 개화관료인 관찰사를 처단한 의병이었다. 그러나 서울 진격 중에 가평 부근 벌업산(보납산) 전투에서 경군에게 패퇴하였고 잔여의병은 화좌의병과 관동의병으로 합세하였다. 한편 호좌의병은 원주의병을 모체로 동년 2월 3일 영월에서 일어나 한말의병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였다. 특히 제천을 중심으로 청주·단양·안동·문경·원주 일대에서 관찰사, 군수 등 친일관리를 처단하였고 이어 평창.정선.양구 등지에서도 의병항쟁의 기반을 하였다. 그러나 충주와 제천에서 연이어 패한 후에는 만주로 이동하여 대일항쟁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관동의진은 강릉을 중심으로 동년 1월 30일 관동창의소를 설치하고 '원산진격작전'을 시도하는 등 강원도 영동일대와 함경도 남부지역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렇듯 강원의병이 대일항쟁을 펼치고 있을 때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였고, 친일내각이 물러나 단발령을 철회하였으며, 국왕이 의병해산을 종용하여 대부분의 전기의병이 해산하였다. 후기 을사의병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유생들은 상소,격문으로 조약파기를 주장하고, 지사들의 자결로 이어지자 마침내 '주권회복'을 위한 구국의병 항쟁이 다시 일어났다. 강원의병은 조약 늑결 직전인 1905년 9월에 기병한 원용석의 주천의병으로 시작되었고, 1906년부터는 영서지방에서 박장호의 홍천의진, 최도환의 양구의진, 영동지방세거 김하규, 황철일의 삼척의진, 김현규의 울진의진이 일어나 강원도의병의 맥을 이어갔다.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한 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방위를 목표로 치열한 항쟁을 이어갔다. 강원도에서는 1907년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민긍호(특무정교), 김덕제(정위) 의병진이 정미의병의 기폭제 역활을 하였다. 민긍호의진은 원주·제천·충주·장호원·양근·화천·양구,등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의 기세를 떨쳤고, 김덕제의진은 영동지방으로 진출하여 강릉,양양,간성,통천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또 춘천에서는 류홍석이 1907년 8월 그의 친족과 문인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던 중 가평부근 주길리 전투에서 혈전을 벌이고 패하였다. 툭하 류홍석의 자부(며느리) 윤희순은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시를 돋구고 군자금을 모금하던 등 적극적으로 춘의진을 지원하였다. 지용기 역시 8월부터 화천, 춘천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춘천 방돌리 전투에서 혈전 끝에 전사하였고, 홍천에서는 박장호의진이 일어나 대일항쟁을 이어갔다. 한편 1907년 9월 원주에서 일어난 이인영, 이은찬의 관동창의군은 대일 선전포고를 열강에게 알리고 12월 전국의병연합체인 십삼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다. 강원의병은 십상도창의대진소의 선봉이 되어 서울탈환작전에 앞장서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1907년 9월 의병을 일으킨 왕회종, 김태묵의진은 철원, 화천에서 활약하였고 허위의진은 10월부터 철원 심원사를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영동일대에서는 성익현, 변학기,주광석, 최돈호의진 등 수많은 의병진이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또한 항일의병항쟁은 국외로도 이어져 박장호의병장은 만주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류인석의병장은 연해주에서 항일기지를 구축하며 1910년 6월 삽삼도의군을 결성하여 도총재로서 국내진공작전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강원도의병은 국자존망에 처하여 생사를 초월한 우국충정으로 가장 처철하게, 가장 오랫동안 끝까지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한말 강원의병의 항일 정신과 그 전통은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계승되어 조국 광복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1894년 광복이 되기까지 반세기 걸쳐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치열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 시기 강원도 등 광복이 될 때까지 끈질기게 대일항쟁을 펼쳤다.한말의병은 갑오의병(1894), 을미의병(1895),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1907)으로 이어지면서 전환기의병(1909)이 종식되는 1915년 전후 약 20년동안 대일 구국항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강원도의병은 갑오의병에서부터 전항쟁기를 통하여 '피의 항쟁'을 펼쳤다. 원래 강원도 지역은 한말의병의 진원지였고 웅거지였다. 강원의병은 화서 이항로의 척사이념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이 이끌었으며, 산포수가 많아 싸움 기술이 뛰어났고, 산악지대라 장기전과 유격전을 펼치는데 이점이 많았다. 여기에 무기 제조장을 설치하여 스스로 화약과 무기를 만들어 만들어 사용하게 되면서 다른 지역보다 활발하게 의병활쟁 활동이 전개되었다.
전기의병은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과 친일내각이 강행한 단발령 시행으로 인하여, 위정척사사장이 투철한 유림들이 주도하여, 국수보복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다. 이때 강원도의병은 영서 북부지역에서 이소응의 춘천의병, 영서 남부지역에서 류인석의 호좌의병 그리고 영동지역에서 민용호의 관동의병이었다. 1896년 1월 20일에 기병한 춘천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 처음으로 개화관료인 관찰사를 처단한 의병이었다. 그러나 서울 진격 중에 가평 부근 벌업산(보납산) 전투에서 경군에게 패퇴하였고 잔여의병은 화좌의병과 관동의병으로 합세하였다. 한편 호좌의병은 원주의병을 모체로 동년 2월 3일 영월에서 일어나 한말의병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였다. 특히 제천을 중심으로 청주·단양·안동·문경·원주 일대에서 관찰사, 군수 등 친일관리를 처단하였고 이어 평창.정선.양구 등지에서도 의병항쟁의 기반을 하였다. 그러나 충주와 제천에서 연이어 패한 후에는 만주로 이동하여 대일항쟁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관동의진은 강릉을 중심으로 동년 1월 30일 관동창의소를 설치하고 '원산진격작전'을 시도하는 등 강원도 영동일대와 함경도 남부지역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렇듯 강원의병이 대일항쟁을 펼치고 있을 때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였고, 친일내각이 물러나 단발령을 철회하였으며, 국왕이 의병해산을 종용하여 대부분의 전기의병이 해산하였다. 후기 을사의병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유생들은 상소,격문으로 조약파기를 주장하고, 지사들의 자결로 이어지자 마침내 '주권회복'을 위한 구국의병 항쟁이 다시 일어났다. 강원의병은 조약 늑결 직전인 1905년 9월에 기병한 원용석의 주천의병으로 시작되었고, 1906년부터는 영서지방에서 박장호의 홍천의진, 최도환의 양구의진, 영동지방세거 김하규, 황철일의 삼척의진, 김현규의 울진의진이 일어나 강원도의병의 맥을 이어갔다.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한 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방위를 목표로 치열한 항쟁을 이어갔다. 강원도에서는 1907년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민긍호(특무정교), 김덕제(정위) 의병진이 정미의병의 기폭제 역활을 하였다. 민긍호의진은 원주·제천·충주·장호원·양근·화천·양구,등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의 기세를 떨쳤고, 김덕제의진은 영동지방으로 진출하여 강릉,양양,간성,통천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또 춘천에서는 류홍석이 1907년 8월 그의 친족과 문인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던 중 가평부근 주길리 전투에서 혈전을 벌이고 패하였다. 툭하 류홍석의 자부(며느리) 윤희순은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시를 돋구고 군자금을 모금하던 등 적극적으로 춘의진을 지원하였다. 지용기 역시 8월부터 화천, 춘천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춘천 방돌리 전투에서 혈전 끝에 전사하였고, 홍천에서는 박장호의진이 일어나 대일항쟁을 이어갔다. 한편 1907년 9월 원주에서 일어난 이인영, 이은찬의 관동창의군은 대일 선전포고를 열강에게 알리고 12월 전국의병연합체인 십삼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다. 강원의병은 십상도창의대진소의 선봉이 되어 서울탈환작전에 앞장서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1907년 9월 의병을 일으킨 왕회종, 김태묵의진은 철원, 화천에서 활약하였고 허위의진은 10월부터 철원 심원사를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영동일대에서는 성익현, 변학기,주광석, 최돈호의진 등 수많은 의병진이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또한 항일의병항쟁은 국외로도 이어져 박장호의병장은 만주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류인석의병장은 연해주에서 항일기지를 구축하며 1910년 6월 삽삼도의군을 결성하여 도총재로서 국내진공작전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강원도의병은 국자존망에 처하여 생사를 초월한 우국충정으로 가장 처철하게, 가장 오랫동안 끝까지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한말 강원의병의 항일 정신과 그 전통은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계승되어 조국 광복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강원도의 만세시위는 총 95건에 이르고, 6만 5400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였다. 일제는 강원도 3.1운동과 관련하여 검거된 수가 1,156명이라 하였다. 피검자가 가장 많은 곳은 175명의 화천군과 172명의 양양군이고, 50명 이상인 곳은 원주군, 홍천군, 김화군, 철원군, 영월군,강릉군, 이천군, 횡성군, 춘천군이며, 50명 이내인 곳은 회양군, 울진군, 평강군, 간성군, 정선군, 양구군, 인제군이었으며 14명의 평창군이 가장 적었다. 그러나 일제는 국제적 이목을 고려하여 3.1운동의 실태를 고의로 축소하여 그들의 만행을 감추려 하였으므로 피검자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3.1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거족적 자주독립운동이었다. 따라서 3.1운동은 학구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한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에 천명함으로써 인식을 새롭게 하여 일제의 통치정택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특히 3.1운동은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시아 약소국가의 민족우동과 저항운동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외 각지에서 정치,경제,사회, 문화의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강원도에서는 우선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조직한 대한독립애국단 산하에 강원도애국단이 철원에서 1919년 8월 조직되었다. 평창과 양양에는 도단의 하부조직으로 군단이 조직되었고 특히 평창군단에서는 창일계를 조직하여 독립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독립운동 자금 모금 과정에서 비밀이 드러나 관계자들이 모두 체포되는 불운을 겪었으며, 애국단의 활동도 끝나고 말았다.
한편 국내에서 합법적인 단체로 1927년 2월 결성한 신간회의 강원도지회가 1927년 7월 춘천기독교회관에서 창립되었다. 강원도에는 양양, 강릉, 울진, 고성, 삼척, 양구, 원주에 지회가 결성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는 8월 29일을 국치일로 정하고 이날을 밥 없이 죽을 먹으며 국치를 마음속에 되새기도록 하였으며,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조선본위의 교육실시를 요구하였다. 또한 인권옹호운동, 만주이민단대 등의 정치적인 요구도 있었지만 계몽운동을 사거나 봉건적인 습독을 타파하기 위해 활동하였으며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던 농민,노동자 운동과 학생운동에 적극 개입하여 사상을 지도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강원도에서는 양양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으며 주로 영서지역 보다는 영동지역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아울러 신간회의 자매 단체이던 근우회 지회도 춘천,양양,강릉에 결성되어 여성문제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 야학 실시, 문맹퇴치 여공파업의 진상조사, 광주학생운동 및 각종 항일학생운동 지도와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3.1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일제의 민족 차별과 식민지 노예교육에 항거하여 동맹휴학 비밀결사, 단체조직, 계몽운동, 항일시위 등으로 나타났다. 동맹휴학운동은 때에 따라 다양한 계기로 전개되었는데, 1921년 11우러에 삼척보통학교의 동맹휴학운동이 있었고, 1923년 4월에는 고성보통학교, 1923년 5월에는 양양보통 학생들의 동맹휴학운동이 있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외 각지에서 정치,경제,사회, 문화의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강원도에서는 우선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조직한 대한독립애국단 산하에 강원도애국단이 철원에서 1919년 8월 조직되었다. 평창과 양양에는 도단의 하부조직으로 군단이 조직되었고 특히 평창군단에서는 창일계를 조직하여 독립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독립운동 자금 모금 과정에서 비밀이 드러나 관계자들이 모두 체포되는 불운을 겪었으며, 애국단의 활동도 끝나고 말았다.
한편 국내에서 합법적인 단체로 1927년 2월 결성한 신간회의 강원도지회가 1927년 7월 춘천기독교회관에서 창립되었다. 강원도에는 양양, 강릉, 울진, 고성, 삼척, 양구, 원주에 지회가 결성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는 8월 29일을 국치일로 정하고 이날을 밥 없이 죽을 먹으며 국치를 마음속에 되새기도록 하였으며,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조선본위의 교육실시를 요구하였다. 또한 인권옹호운동, 만주이민단대 등의 정치적인 요구도 있었지만 계몽운동을 사거나 봉건적인 습독을 타파하기 위해 활동하였으며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던 농민,노동자 운동과 학생운동에 적극 개입하여 사상을 지도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강원도에서는 양양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으며 주로 영서지역 보다는 영동지역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아울러 신간회의 자매 단체이던 근우회 지회도 춘천,양양,강릉에 결성되어 여성문제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 야학 실시, 문맹퇴치 여공파업의 진상조사, 광주학생운동 및 각종 항일학생운동 지도와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3.1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일제의 민족 차별과 식민지 노예교육에 항거하여 동맹휴학 비밀결사, 단체조직, 계몽운동, 항일시위 등으로 나타났다. 동맹휴학운동은 때에 따라 다양한 계기로 전개되었는데, 1921년 11우러에 삼척보통학교의 동맹휴학운동이 있었고, 1923년 4월에는 고성보통학교, 1923년 5월에는 양양보통 학생들의 동맹휴학운동이 있었다.
강원도 항일애국선열 추모탑은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14-1에 있다.
江原道抗日運動愛國先烈追慕塔(강원도항일애국선열추모탑)
江原道抗日運動愛國先烈追慕塔(강원도항일애국선열추모탑)
江原道抗日運動愛國先烈追慕塔(강원도항일애국선열추모탑)
追慕文(추모문)
우리 민족은 반세기 동안 대일구국의 성전에서 신명을 바쳐 헌신한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네 오늘처럼 내 나라 내 땅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나이다. 이에 우리 도민은 광복 50주년과 한국독립운동 101주년을 맞이하여 이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면서 항일애국선열의 혼백과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추모탑을 정성 모아 이곳에 건립하나이다. 재천의 영령이시여! 오늘의 이 성전은 갑오(의병)이래 반백년에 걸쳐 선열들이 대일독립항쟁에 뿌리신 원루와 열혈로 장식되었나니 우리나라가 광복되기까지 구비구비의 파란과 마디마디의 형극에서 이특한 선열의 열적이 아닌 바 있으리까 그러므로 조국광복에 위국습신하신 선열의 피맺힌 흔적은 그대로 번연한 한국독립운동사의 성적이 되었나이다.
애국선열이시어! 조국광복의 성전에 남기신 위훈이야말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 백두필으로 휘둘려 쓴들 어찌 다 헤아려 글귀에 담으오리까. 어찌 숭앙의 간절한 겨레의 뜻을 추모문에 고루 새기오리까. 참으로 숭고한 혈한의 결정이요. 혈루로 점철된 선열의 항일투쟁은 마침내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면서 8.15광복을 쟁취하였음이 아니오리까. 따라서 일제의 패전은 연합군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곧 참전국의 일원인 우리 한국의 승리가 아니오리까.
영령은 아시나이까. '그날이 오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라' 하던 그날이 왔으매, 그 인경의 성향에 감격하여 겨레는 울며 뛰며 열광하였나이다. 더구나 암울했던 역사의 질곡에서 대일항쟁 끝에 쟁취한 민족의 해방이요 값진 조국의 광복이었기에 우리는 8.15광복이 곧 조국의 독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나이다. 그래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감격하여 서로가 얼싸안고 딩굴면서 환희에 넘쳤나이다. 아! 분하고도 슬프도다. 당시 미소의 수뇌들이 웃으며 잠정한 군사분계선이 끝내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분열로 이어졌으니, 저 6.25의 동족상잔은 물론이요, 남북 이산의 아픔을 이토록 오래 겪게 될 줄이야. 그 누군들 짐작이나 하였으리까. 마침내 우리가 분단의 책임이 저들만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과연 통한 중에 부르짖은 겨레의 각오는 무엇이었고, 가슴져며오는 회한과 자책에서 항일성전에 넘어진 선열에게 우리는 무엇이라 자성하며, 또 무엇으로 보답하여 하였던가. 이에 재천영렬에게 향을 피워 올리는 것으로 한다 하오리까. 노래를 불러 바치는 것으로 한다 하오리까. 이만한 의식이면 유한이 없다고 하오리까.
순국영령이시여! 아마도 선열은 조국광복의 대열에서 풍찬노숙하던 그 시절이 잔잔히 회상되셨으리라. 떄로는 달밝은 광야에서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모진 추위를 이겨내며 고향을 그리는 눈물을 수없이 흘렸을 적에,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조국의 완전 독립과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니셨으리까. 그러나 이 땅의 현실은 선열이 그렇게도 그리던 그때의 그 모습이 아님을 통탄치 않을 수 없나이다. 이 지경에서 우리의 다짐이 없을 수 있으리까. 오늘은 7천만 우리 겨레는 한결같이 한 때의 주권 상실과 분단(민족, 국토) 현실의 비운을 믿고 민족이나 국가 앞에 우리 5천년 민족사와 다시 만날 제2의 광복(통일 조국)을 열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통일광복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사명이요, 우리의 성취해야만 하는 소임이 아니오리까. 다시금 다짐하면서 분려정진할 것을 명심하오리다.
애국선열이시여! 오늘 우리는 분단 50년을 되돌아 보면서 강원(을미)의병 100주년을 기념하고 광복 50주년을 함께 경축하나이다. 이에 유서 깊은 의병의 진원지이며, 조상의 얼이 살아 숨 쉬는 강원도 땅 이 자리에 2백만 도민의 정성과 슬기를 모아 건립한 애국선열 추모탑은 그 품은 뜻이 선열의 순국정신과 넋을 기리기 위함이요, 분단된 오늘의 현실을 자책함이며, 남북통일을 염원하고 맹세함이니, 그런고로 추모탑은 추념탑이고, 자성탑이며, 서원탑으로 곁들여 그 뜻을 담을 지어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하나의 겨레가 평화롭게 세워야 할 금자탑이 있나니 그것이 바로 조국통일 기념탑의 건립이 아니오리까. 잠시 그날의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그 얼마나 장관이런가. 그 얼마나 형언을 초월한 영광의 통일탑이 아니런가. 재천의 선열이시여! 오늘 자유와 광복의 태극 깃발 아래에서 뜻깊은 이날을 맞이하매 선열이 우리를 가호하는지라. 무엇을 구애하며 무엇에 주저하리까. 일찌기 선열은 대의 앞에 우뚝 서서 겨레가 나아가야 할 지표를 일러주셨고, 민족사의 길목에서 겨레의 앞날을 등대처럼 비춰주셨나이다. 수많은 애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있음이 아니오리까. 그러므로 선열의 살신보국한 위대한 열적은 역사 위에 영원히 빛날 것이며 민족의 귀감으로 가슴 깊이 새기오리다.
재천의 영령이시여! 진정으로 두 손 모아 간절히 비옵나이다. 다시는 이 땅에 치욕과 비통한 역사가 없게 하시고, 전진과 영광만이 가득찬 한국으로 키워 주시며 통일조국으로 우뚝 서게 하시옵소서. 선열을 추념하고 만곡의 눈물과 애도의 지정을 바치오니 굽어살피시옵소서. 남기산 유지,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가겠사오니, 슬기와 용기를 주시어 통일광복과 세계화로 향진하는 이 나라 이 겨레의 앞날을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명목을 비오며, 애적의 정성을 영전에 드리나이다.
서기 199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반세기 동안 대일구국의 성전에서 신명을 바쳐 헌신한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네 오늘처럼 내 나라 내 땅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나이다. 이에 우리 도민은 광복 50주년과 한국독립운동 101주년을 맞이하여 이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면서 항일애국선열의 혼백과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추모탑을 정성 모아 이곳에 건립하나이다. 재천의 영령이시여! 오늘의 이 성전은 갑오(의병)이래 반백년에 걸쳐 선열들이 대일독립항쟁에 뿌리신 원루와 열혈로 장식되었나니 우리나라가 광복되기까지 구비구비의 파란과 마디마디의 형극에서 이특한 선열의 열적이 아닌 바 있으리까 그러므로 조국광복에 위국습신하신 선열의 피맺힌 흔적은 그대로 번연한 한국독립운동사의 성적이 되었나이다.
애국선열이시어! 조국광복의 성전에 남기신 위훈이야말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 백두필으로 휘둘려 쓴들 어찌 다 헤아려 글귀에 담으오리까. 어찌 숭앙의 간절한 겨레의 뜻을 추모문에 고루 새기오리까. 참으로 숭고한 혈한의 결정이요. 혈루로 점철된 선열의 항일투쟁은 마침내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면서 8.15광복을 쟁취하였음이 아니오리까. 따라서 일제의 패전은 연합군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곧 참전국의 일원인 우리 한국의 승리가 아니오리까.
영령은 아시나이까. '그날이 오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라' 하던 그날이 왔으매, 그 인경의 성향에 감격하여 겨레는 울며 뛰며 열광하였나이다. 더구나 암울했던 역사의 질곡에서 대일항쟁 끝에 쟁취한 민족의 해방이요 값진 조국의 광복이었기에 우리는 8.15광복이 곧 조국의 독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나이다. 그래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감격하여 서로가 얼싸안고 딩굴면서 환희에 넘쳤나이다. 아! 분하고도 슬프도다. 당시 미소의 수뇌들이 웃으며 잠정한 군사분계선이 끝내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분열로 이어졌으니, 저 6.25의 동족상잔은 물론이요, 남북 이산의 아픔을 이토록 오래 겪게 될 줄이야. 그 누군들 짐작이나 하였으리까. 마침내 우리가 분단의 책임이 저들만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과연 통한 중에 부르짖은 겨레의 각오는 무엇이었고, 가슴져며오는 회한과 자책에서 항일성전에 넘어진 선열에게 우리는 무엇이라 자성하며, 또 무엇으로 보답하여 하였던가. 이에 재천영렬에게 향을 피워 올리는 것으로 한다 하오리까. 노래를 불러 바치는 것으로 한다 하오리까. 이만한 의식이면 유한이 없다고 하오리까.
순국영령이시여! 아마도 선열은 조국광복의 대열에서 풍찬노숙하던 그 시절이 잔잔히 회상되셨으리라. 떄로는 달밝은 광야에서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모진 추위를 이겨내며 고향을 그리는 눈물을 수없이 흘렸을 적에,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조국의 완전 독립과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니셨으리까. 그러나 이 땅의 현실은 선열이 그렇게도 그리던 그때의 그 모습이 아님을 통탄치 않을 수 없나이다. 이 지경에서 우리의 다짐이 없을 수 있으리까. 오늘은 7천만 우리 겨레는 한결같이 한 때의 주권 상실과 분단(민족, 국토) 현실의 비운을 믿고 민족이나 국가 앞에 우리 5천년 민족사와 다시 만날 제2의 광복(통일 조국)을 열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통일광복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사명이요, 우리의 성취해야만 하는 소임이 아니오리까. 다시금 다짐하면서 분려정진할 것을 명심하오리다.
애국선열이시여! 오늘 우리는 분단 50년을 되돌아 보면서 강원(을미)의병 100주년을 기념하고 광복 50주년을 함께 경축하나이다. 이에 유서 깊은 의병의 진원지이며, 조상의 얼이 살아 숨 쉬는 강원도 땅 이 자리에 2백만 도민의 정성과 슬기를 모아 건립한 애국선열 추모탑은 그 품은 뜻이 선열의 순국정신과 넋을 기리기 위함이요, 분단된 오늘의 현실을 자책함이며, 남북통일을 염원하고 맹세함이니, 그런고로 추모탑은 추념탑이고, 자성탑이며, 서원탑으로 곁들여 그 뜻을 담을 지어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하나의 겨레가 평화롭게 세워야 할 금자탑이 있나니 그것이 바로 조국통일 기념탑의 건립이 아니오리까. 잠시 그날의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그 얼마나 장관이런가. 그 얼마나 형언을 초월한 영광의 통일탑이 아니런가. 재천의 선열이시여! 오늘 자유와 광복의 태극 깃발 아래에서 뜻깊은 이날을 맞이하매 선열이 우리를 가호하는지라. 무엇을 구애하며 무엇에 주저하리까. 일찌기 선열은 대의 앞에 우뚝 서서 겨레가 나아가야 할 지표를 일러주셨고, 민족사의 길목에서 겨레의 앞날을 등대처럼 비춰주셨나이다. 수많은 애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있음이 아니오리까. 그러므로 선열의 살신보국한 위대한 열적은 역사 위에 영원히 빛날 것이며 민족의 귀감으로 가슴 깊이 새기오리다.
재천의 영령이시여! 진정으로 두 손 모아 간절히 비옵나이다. 다시는 이 땅에 치욕과 비통한 역사가 없게 하시고, 전진과 영광만이 가득찬 한국으로 키워 주시며 통일조국으로 우뚝 서게 하시옵소서. 선열을 추념하고 만곡의 눈물과 애도의 지정을 바치오니 굽어살피시옵소서. 남기산 유지,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가겠사오니, 슬기와 용기를 주시어 통일광복과 세계화로 향진하는 이 나라 이 겨레의 앞날을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명목을 비오며, 애적의 정성을 영전에 드리나이다.
서기 1995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