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조씨 13충 독립유공자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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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372-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조수천(趙壽千)
공(公)의 휘(諱)는 수천(壽千), 자(字)는 중수(仲叟)이고 호(號)는 복제(北溪)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손자이며 좌윤공(左尹公) 조금호(趙金虎)의 아들로 성종(成宗) 13년 임인(1482)년 함안 원북(咸安 院北)에서 태어나 명종(明宗) 8년 계축(1553)년 3월 25일 돌아가시니 향년 72이다. 연산군(燕山君) 9년 계해(1503)년 22세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연산군(燕山君)의 정치(政治)가 극도로 문란(亂)하였을 때 선전관(宣傳官)의 직책으로 정국계획(靖國計劃)에 참여하여 큰 공(功)을 세워 정국원종일등공신(靖原從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포상(褒賞)으로 부(父)는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증직(贈職)되었다.
중종(中宗)은 공(公)에게 입시(入侍)를 명(命)하고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난리를 당하여 절의(節義)를 지키는 것은 쉬우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부지(扶持)하고 위태(危殆)로움을 구(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로다." 하며 외직(外職)으로 함흥부사(咸興府使)를 제수(除授)하였다. 이어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내직(內職)인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임금을 호위(護衛)하는 시종(侍從)의 반열(班列)에 있으면서 공적(功績)이 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昇進)한 후 43세 때 다시 외직(外職)인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에 제수(除授)되었으며 그 후 경상우수군절도사(慶尙右水軍節度使)로 재직(在職)하였다. 30여 년 동안 봉직(奉職) 후 64세 때 을사사화 (乙巳士禍)가 일어난 것을 보고는 경상우수군절도사(慶尙右水軍節度使) 직(職)을 사임하고 고향(故鄕)에 돌아와 북계(北溪) 위 신동(申洞)에 삼수정(三樹亭)을 지어 노년까지 유유(悠悠)히 자연(自然)을 즐겼다. 용맹(勇猛)과 무예(武藝)가 남보다 뛰어났고 세 임금을 섬기면서 근신(謹愼)하고 사기를 맞춰 사직(辭職)하여 해(害)는 공(公)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비원의 헌수와 조경은 두암공 후 임계공 종중(회문동)에서 기증하였습니다.
2017.6.10 함안조씨 대종회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372-2 서산서원 함안조씨 독립유공자 공적비, 13충비를 찾아왔다.
咸安趙氏 獨立有功者碑(함안조씨 독립유공자비)
咸安趙氏 獨立有功者碑(함안조씨 독립유공자비)
뒷마무리가 안 되어서인지 비석 뒷면이 깨끗하지 않다.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조소앙(조용은) 양주

건국훈장 독립장
조시원(조용원) 양주
조인제 연처 안춘생(조시원 사위) 벽성
조명하 송화 조용하 파주
건국훈장 애국장
조강제 함안 조근백 청송 조용한 연천
조시제 연천 조순옥 연천 조주규 함안
조경규 함안 조용태 함안 조용호 함안
조용대 함안 조용섭 무안 조호진 함안
조현욱 청송 조희제 임실 조용주 연천
조성기 함안 조정래 하동 조경식 함안
건국훈장 애족장
조상규 함안 조성규 함안 조석규 함안
조용규 함안 조형규 함안 조용성 함안
조창규 함안 조용구 함안 조동규 함안
조한휘 함안 조한국 함안 조재우 함안
조학제 하동 조경규 경주 조성길 청송
조병국 청송 조경규 경주 조용구 예천
조용필 예천 조우제 진주
이순승(조시원 처) 양주
오영선(조소앙 처) 양주

건국포장
조현규 산청 조성늘 청송 조성노 청송
조성박 청송 조성태 청송 조규락 청송
조규진 청송 조광규 청송 조성규 청송
조능호 청송 조독호 청송

대통령표창
조성우 군위 조용원 함안 조용석 함안
조규명 청송 조옥제 청송 조용원 청송
조규영 청송 조용진 창원

미수훈자
조성술 함안 조방규 함안 조정규 함안
조문규 함안 조용호 함안 조용근 함안
조용환 함안 조갑이 함안 조민제 함안
조삼귀 함안 조정규 함안 조용도 함안
조진규 함안 조이규 함안 조태규 함안
조정규 함안 조굉규 함안 조홍제 함안
조영대 함안 조강제 함안 조영제 함안
조복래 함안 조수규 부산 조차규 부산
조용학 김해
咸安趙氏獨立有功者(함안조씨 독립유공자)
우리 민족 최대 수난사(受難史)인 일제 강점기에 선열(先烈)들은 일제의 온갖 핍박(逼迫)에도 굴하지 않고 치열(熾烈)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展開)하였습니다. 이분들의 피와 땀이 서린 투쟁은 구국광복(救國光復)의 초석(礎石)이 되었습니다.
함안조씨(咸安趙氏) 문중(門中)에서는 독립운동에 헌신(獻身)한 유공자(有功者)가 90여 명이 넘으니 실로 장하고 경탄(敬歎)할 일입니다.
예로부터 함안조씨(咸安趙氏)는 충의(忠義)의 집안으로 나라가 위난(危難)에 처하면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精神)으로 국난극복(國難克服)의 일익(一翼)을 담당한 충신(忠臣)이 많았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한 시기에는 순의(殉義)한 일곱 분을 포함한 13명의 충신이 나왔습니다.
이런 충의(忠義)의 정신이 후대(後代)로 계승(繼承)되어 우리 민족 최대 규모 독립운동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절정(絶頂)을 이룬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정원의장(議政院議長)과 외무총장(外務總長)을 지내고 일가(一家)에서 12명의 독립유공 수훈자(受勳者)가 나온 조소앙(趙素昻) 선생(先生), 대만에서 일왕(日王)의 장인을 자격(刺擊)하고 23세의 나이에 순국(殉國)한 조명하(趙明河) 의사(義士) 외 90여분의 공적(功績)을 기록한 공훈록(功勳錄)을 발간한 일이 있는 함안조씨 문중에서는 다시 이분들의 이름을 기록한 비석을 수비(竪碑)하니 이 또한 선대(先代)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후세(後世)에 전하는 일로 매우 이례적(異例的)이고 값어치 있는 일입니다.
시대(時代)와 사람에 따라서 가치관(價値觀)은 바뀔 수 있지만 나라를 위하여 헌신(獻身)한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의 숭고(崇高)한 정신(精神)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큰 가치(價値)입니다.
함안조씨(咸安趙氏)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제공(諸公)들의 이름 앞에 삼가 옷깃을 여밉니다.
2017년 6월 光復會 會長(광복회 회장) 朴維徹(박유철)
함안조씨 십삼충(咸安趙氏十三忠)
충(忠)과 의(義)는 사람의 당연한 도리(道理)이나 이를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 나라 안에서도 충절(忠節)의 인물은 많지 않은데 함안조씨(咸安趙氏) 문중(門中)은 대대로 충의(忠義)의 가문(家門)으로 나라가 위난(危難)에 처했을 때 분연(奮然)히 일어나 위국헌신(爲國獻身)한 분이 열 명이 넘으니 놀랍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 선생의 충절의 정신이 후세(後世)로 면면(綿綿)히 이어온 결과이기도 하다. 조수천(趙壽千) 공(公)은 정국계획(靖國計劃)에 참여하여 위훈(偉勳)을 세운 정국원종일등공신(靖國原從一等功臣)이고, 조붕(趙鵬)‧충의공(忠毅公) 조종도(趙宗道)‧조준남(趙俊男)‧조신도(趙信道)‧조민도(趙敏道)‧조응도(趙凝道) 제공(諸公)은 임진왜란 시에 전장(戰場)에서 싸우다 순국(殉國)하였으며 세 분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다. 조탄(趙坦)‧조방(趙垹)‧조형도(趙亨道) 제현(諸賢)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을 막아 공을 세웠고 조탄(趙坦) 공(公)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다. 조익도(趙益道) 공(公)과 조선도(趙善道) 공(公)은 이괄(李适)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공(功)을 세워 진무원종일등(振武原從一等) 훈(勳)에 녹훈(錄勳)되었다. 조계선(趙繼先) 공(公)은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청군(淸軍)이 공격(攻擊)하여 왔을 때 이완(李莞) 장군과 같이 싸워 크게 공(功)을 세우고 순국(殉國)하였다.
문숙공(文肅公)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선생은 한 문중(門中)에서 열 분이 넘는 충신(忠臣)이 나오는 일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드물고 오래도록 칭송(稱頌)할 일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선생은 함안조씨십삼충록(咸安趙氏十三忠錄) 서문에서 사관(史官)인 나는 삼가 이분들의 관직(官職), 명자(名字), 사적(事蹟) 등을 서술하여 역사(歷史)의 자료로 엮는다고 하였다. 함안조씨 13충신 제현(諸賢)들의 사적(事績)은 한 문중(門中)의 자랑거리만이 아니라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와 후세인(後世人)에게도 귀감(龜鑑)이 되도록 이를 기록한다.
2017년(丁酉(정유)) 6월
전 서울市立大學校(시립대학교) 總長(총장) 慶州後人(경주후인) 鄭熙彩(정희채) 謹撰(근찬)
함안조씨 십삼충(咸安趙氏十三忠)
충(忠)과 의(義)는 사람의 당연한 도리(道理)이나 이를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 나라 안에서도 충절(忠節)의 인물은 많지 않은데 함안조씨(咸安趙氏) 문중(門中)은 대대로 충의(忠義)의 가문(家門)으로 나라가 위난(危難)에 처했을 때 분연(奮然)히 일어나 위국헌신(爲國獻身)한 분이 열 명이 넘으니 놀랍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 선생의 충절의 정신이 후세(後世)로 면면(綿綿)히 이어온 결과이기도 하다. 조수천(趙壽千) 공(公)은 정국계획(靖國計劃)에 참여하여 위훈(偉勳)을 세운 정국원종일등공신(靖國原從一等功臣)이고, 조붕(趙鵬)‧충의공(忠毅公) 조종도(趙宗道)‧조준남(趙俊男)‧조신도(趙信道)‧조민도(趙敏道)‧조응도(趙凝道) 제공(諸公)은 임진왜란 시에 전장(戰場)에서 싸우다 순국(殉國)하였으며 세 분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다. 조탄(趙坦)‧조방(趙垹)‧조형도(趙亨道) 제현(諸賢)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을 막아 공을 세웠고 조탄(趙坦) 공(公)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다. 조익도(趙益道) 공(公)과 조선도(趙善道) 공(公)은 이괄(李适)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공(功)을 세워 진무원종일등(振武原從一等) 훈(勳)에 녹훈(錄勳)되었다. 조계선(趙繼先) 공(公)은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청군(淸軍)이 공격(攻擊)하여 왔을 때 이완(李莞) 장군과 같이 싸워 크게 공(功)을 세우고 순국(殉國)하였다.
문숙공(文肅公)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선생은 한 문중(門中)에서 열 분이 넘는 충신(忠臣)이 나오는 일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드물고 오래도록 칭송(稱頌)할 일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선생은 함안조씨십삼충록(咸安趙氏十三忠錄) 서문에서 사관(史官)인 나는 삼가 이분들의 관직(官職), 명자(名字), 사적(事蹟) 등을 서술하여 역사(歷史)의 자료로 엮는다고 하였다. 함안조씨 13충신 제현(諸賢)들의 사적(事績)은 한 문중(門中)의 자랑거리만이 아니라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와 후세인(後世人)에게도 귀감(龜鑑)이 되도록 이를 기록한다.
2017년(丁酉(정유)) 6월
전 서울市立大學校(시립대학교) 總長(총장) 慶州後人(경주후인) 鄭熙彩(정희채) 謹撰(근찬)
13충비‧독립유공자비 수비 추진위원
고문 : 조성도 조성훈 조필제 조일제 조성래 조재우
대종회 회장 : 조동휘
추진 위원장 : 조현준
추진 위원 : 조성삼 조영규 조용득 조효제 조홍래 조종연
대종회 회관
건립추진위원장 : 조욱래
2017년(정유) 6월
조익도(趙益道)
공(公)의 휘(諱)는 익도(道)요 자(字)는 여행(汝行). 호(號)는 도곡(道谷)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公節) 조려(趙旅)의 5세손(世孫)으로 선조 을해(1575)년에 태어나 계유(160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이르렀고 인조 정해(1647)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73이었다.
공(公)이 선전관(宣傳官)이던 갑자(1624)년에 이괄(李道)이 평소 두려워하던 공(公)을 출장 보내고 난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공(公)은 왕(王)이 피난해 있던 공주로 가서 손가락을 깨물어 역적 토벌을 청하는 혈서를 올리니 왕께서 원수(元帥) 진중에 전속 명령을 내렸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우니 왕이 "난에 임하여 한 번의 죽음은 쉽지만 거취를 분명하게 함은 어려운 것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쓴 충성은 송(宋)나라 악비(岳飛)의 등에 새긴 충절과 같다." 라고 하며 악무목(岳武穆)의 정충록(精忠錄)을 하사(下賜)하고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였다.
그 후 기축(1769)년에 영조에서 악왕정충록(岳王精忠錄)을 찾았으나 인조의 하사품인 정충록(精忠錄)을 유일하게 공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어 이를 장계와 함께 올리니 영조에서 교서관(校書館)에 새로이 간행할 것을 명하고 서문에 이르기를 “정충록(精忠錄)을 보니 옛적에 충성을 표창한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있으니 지금 어찌 다른 은전(恩典)이 없을쏘냐! 선전관(宣傳 官) 조익도(趙益道)를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하고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학문에 능한 자는 이조(吏曹)에 명하여 문관(文官)으로 임용하며 무(武)에 능하면 병조(兵曹)에 명하여 무관(武官)으로 등용하되 이 일 등은 치레로만 그치는 사례가 많으니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단단히 명하여 즉시 그 성명을 물어 임용토록 할지니라." 라고 하였고 덧붙여 전교(傳敎) 를 내렸다. 이와 같은 왕(王)의 전교(傳敎)로 공(公)의 충성함이 세상에 알려지니 세상 사람들이 조선의 악비(岳飛)라 칭송하였다.

조선도(趙善道)
공(公)의 휘(諱)는 선도(善道)요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묵곡(黙谷)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世孫)으로 선조(宣祖) 경진(1580)년에 태어나 인조(仁祖) 경진(1640)년에 돌아가셨다.
광해군(光海君) 무오(1518)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 어모부장(禦侮部將)에 이르렀다. 인조 갑자(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무관으로 안현(鞍峴) 전투에 참전(參戰)하였다. 마침 이괄(李适)이 직접 지휘하는 군사들이 기세등등하게 공격해 오니 공(公)은 주장(主將)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眞言)하였다.
"저 역도(逆徒)들은 광폭한 힘만 믿고 있을 뿐 군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수는 교만(驕慢)하고 군졸은 나태(懶怠)하니 반드시 전복(顚覆)될 것입니다." 하며 피곤해 있는 이괄(李适)을 칠 것을 주장하여 즉각 공격(攻擊)을 명령하고 몸을 날려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군사들도 공(公)의 뒤를 따르며 일당백(一當百)의 용맹(勇猛)으로 적을 섬멸(殲滅)하여 나라에 큰 공(功)을 세웠다.
조정에서 선고(先考)를 판결사(判決事)로, 선비(先妣)를 숙부인(淑夫人)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진무원종일등훈(振武原從一等勳)에 족형(族兄) 참의공(參議公) 익도(益道)와 함께 녹훈(錄勳)하였다. 사적(事蹟)이 진주지(晋州誌)에 실려 있다.
공이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산청(山淸) 묵곡(黙谷)으로 귀향(歸歸)하여 시(詩)를 짓고 지내며 여생을 즐겼다.

조계선(趙繼先)
공(公)의 휘(諱)는 계선(繼先)이요 자(字)는 효백(孝伯)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6세손이고 집의공(執義公) 휘 삼(參)의 현손이며 승지공(承旨公) 휘 준남(俊男)의 아들로 선조 3년(1570)에 출생하였다. 공(公)은 지용(智勇)이 뛰어나고 풍모가 장대하였다. 궁마(弓馬)를 익혀 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하여 인조 1년(1623) 관로에 나가 선전관에 제수되었 다. 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중군(中軍) 구성(龜城) 부사 이윤서(李胤緖)는 공의 처남이었다. 원수 장만(張曉)은 조정에 청하여 공을 보내어 이윤서의 귀순을 도모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병 삼천을 이끌고 원수의 진으로 돌아온 이공은 끝내 자결하였고, 그 시신을 수습하여 복명한 공은 기일이 늦었음을 탄핵받아 유배 후 이듬해에 풀려났다. 인조 3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선천(宣川)으로 진을 옮기자 조정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완(李莞)을 의주부윤에 임명해 방어하게 하였다. 이완은 조정에 청하여 공을 막료(막僚)로 불러 군기를 관장하게 하고 군무(軍務)를 의논하였다. 인조 5년(정묘 1627) 정월 13일 후금군(後金軍)이 의주를 침공하여 14일 날이 밝자 많은 적이 성을 넘어 들어와 격전의 함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공은 변방의 수재(守宰) 장수(將帥)들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선봉에서 분격하여 적을 무수히 사살하였으나 화살은 다하고 성은 함락되어 장렬히 순국하니 향년 58이다.
공의 충노(忠奴) 대갑(大甲)이 의주에서 달려와 집에 이 사실을 고한 뒤 앞 소(沼)에 몸을 던지니, 이에 공이 남긴 의발(衣髮)을 수습하여 함안 법수 두배 뒷산에 예장(禮葬)하고 그 묘소 아래에 대갑을 묻었다. 밀암(密庵) 이재(李裁)의 비명(碑銘)에서 "한 집안에 100년을 전후하여 어계(漁溪)의 청풍 고절 5세손의 효행 순절 6세손의 충의 순국 삼절이 모였으니 그 미덕 위대 하도다.”라고 하였다. 숙종 32년 나라에서 부자정려(父子旌閭)를 내렸다.
칠종 5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고, 고종 5년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훈련원도정(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訓練院都正)에 증직(贈職)되었다.
조민도(趙敏道)
공(公)의 휘(諱)는 민도(敏道)요 자(字)는 계유(季由)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世孫)으로 명종(明宗) 병진(1556)년에 태어났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자 공(公)은 처자(妻子)를 장인(丈人)인 직장(直長) 유인흡(尹仁洽)에게 맡기고 결별을 고하며 나라 형편이 이리 어지러우니 한 자루 칼을 들고 싸움터에 나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옳은 일인 즉 살아 돌아옴을 기약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잘라 부인에게 주면서 내 죽거든 이것으로 선산(先山) 아래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공(公)은 가족과 헤어져 순변사(巡邊使) 이일(李盤) 진중(陣中)에 나아가 전투에 참가하였다. 상주(尙州)에서 싸울 때 군사들은 지치고 원조마저 끊겨 도망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분격(奮澈)하여 나라의 위난(危難)을 보고도 도망함은 신하(臣下)의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이 사실을 장계(狀啓)로 올리니 선조(宣祖)가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증직(贈職)하였고, 조세감면(租稅減免)의 특전을 주었다.
공(公)이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겨우 일곱 살로 아무도 그 유해를 거두지 못하였다. 부득이 출정(出征) 전에 남긴 머리카락으로 선산 아래 장사지냈다.
공(公)의 평소 기지(氣志)와 절의(節義)는 시성(詩性)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공(公)이 지은 많은 시(詩) 두루마리와 집안에서의 효행이나 이웃 간의 선행 등을 기록한 것들이 난리에 불타 없어졌다.

조응도(趙凝道)
공(公)의 휘(諱)는 응도(凝道)요 자(字)는 사성(士成), 호(號)는 송오(松塢)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으로 명종 을축(1565)년에 태어나 선조 정유(1597)년에 왜군과 전투 중 순국(殉國)하니 향년 33이다.
19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재직(職)하였다. 공(公)은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렬하여 응전 태세를 강화하였다. 그해 6월의 당포와 당항포 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도와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며 10월의 진주성 전투에서 복병장(伏兵將) 정유경(鄭惟敬)과 함께 군병 오백명을 이끌고 많은 횃불을 밝혀 함성을 질러 원군(援軍)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여 성을 포위한 적군을 퇴각시켰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료로서 전략을 논의하였고, 충무공(忠武公)이 시관(試官)이었던 무과별시(武科別試)에서는 참시관(參誠官)으로 참여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왜군 침입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잠시 피신하기를 권하였으나 공(公)은 "왕명을 받아 국토를 지키는 신하가 어찌 피신을 도모하리요. 차라리 이 땅에서 죽을지언정 불충은 행하지 아니하리라." 하며 크게 노하였다. 운정(雲汀) 박애상(朴愛祥)공과 귤도(橘島) 앞 해전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조정에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훈(錄勳)하고, 통훈대부 병조참의(通訓大夫 兵曹參議)로 증직(贈職)하였다.

조형도(趙亨道)
공(公)의 휘(諱)는 형도(道)이며 자(字)는 경달(景達), 호(號)는 동계(東溪)이다. 생육신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 손으로 명종 22(1567)년 청송(靑松) 안덕(德)에서 망운정공(望雲亭公)의 차자로 태어나 백부 검암공(劒巖公)에게 입양되었다. 1583년 첨지 민추(閔樞)에게 수학하고, 1587년 함안으로 귀성(歸省)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사사한 뒤 3년간 향시(鄕試)에 이어 장원하였다. 임진왜란에 공은 27세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의병을 모집함에 공(公) 역시 의병을 일으켜 정암진(鼎巖津) 전투에 서 큰 전공을 세웠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비국랑을 겸직하였다. 1595년 겨울에 경산현령이 되었으며, 정유재란에는 팔공산(八公山) 회맹(會盟)에 참여하고 화왕산에 입성하여 전공을 세웠다. 1606년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재임하였고, 1617년 본도 토포사(討捕使)로 영천옥에서 탈옥한 죄인 이경기(李景 祺)의 도당을 추포하는데 많은 공을 세워 1622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차하였다. 1623년 3월에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공로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부원수(副元帥). 보성군수(寶城郡守)에 배명(拜命)되었다. 1627년에 공이 본도 호소사(號召史) 장현광(張顯光)의 중군이 되었으며, 그 공로로 진주(晉州)·상주영장(尙州營將)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어 괴산군수(槐山郡守)로 부임하였다. 1629년 경주영장(慶州營將)으로 3년간 재직하였다. 1636년에 청(淸)나라 대군이 서울로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하여 전장으로 달려갈 행장을 최촉(催促)하고 관찰사 심연(沈演)의 충원(忠原) 진영으로 달려갔다. 이때 심연(沈演)이 목계에서 두류(逗留)하면서 진격하지 않거늘 공이 분을 참지 못하고 선봉을 맡겨 주기를 청하였으나 공의 노쇠(老衰)함을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적과 강화(講和)를 논의(論議)한다는 말을 듣고 우국통분(憂國痛憤)하다가 1637년 2월 8일 돌아가시니 향년 71이다.
충의공(忠毅公) 조종도(趙宗道)
공(公)의 휘(諱)는 종도(宗道)요 자호(自號)는 대소헌(大笑軒)이며 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으로 1537년 정유년에 함안 원북에서 태어났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하생이며 1558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뒤 안기도 찰방이 되었다. 이때 이황(李滉) 선생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용인(龍仁)·단성(城) 현감(縣監), 금구(金溝) 현령(縣令)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는 창의(倡義)에 앞장섰으며 촉석루(矗石樓) 삼장사(三壯士)의 한 분이다. 1597년 정유재란에 함양군 수직(咸陽郡守職)에서 물러났음에도 급박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처자와 고을사람들을 거느리고 황석산성에 들어가 안의현감 곽준(郭䞭)과 함께 가토오(加藤清正)가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陷落)되어 순절(殉節)하였다. 부인 전의(全義) 이씨(李氏)는 판서(判書) 이준민(李俊民)의 여식(女息)으로 성(城)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공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 정려(旌閭)를 명하고 충신으로 표창하였다. 부군(夫君)은 충의를 밝히고 부인은 정열(貞烈)을 보전하여 가문을 빛내니 만고의 쌍절(雙節)이라 일컬어 함안(咸安) 원북에 쌍절각(雙節閣)이 건립되어 있다. 산청(山淸) 소남(召南)의 부조묘(不祧廟)에서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를 지내고 있다.
황석산성(山城) 입성(入城) 전에 지은 시(詩)에 공동산(崆峒山) 밖에 사는 것도 오히려 다행이지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처럼 성 안에서 나라위해 죽는 것 또한 명예로운 일이네 [崆峒山外生猶幸 巡遠城中 死亦榮] 하였으니 평소 큰 뜻을 세워 지켜옴이 이와 같았다. 경사(經史)에 밝고 기개가 높고 의리(義理) 정신이 강하며 해학(諧謔)을 즐겼다. 함안(咸安)의 덕암서원(德書巖書院) 함양의 황암사(黃巖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문헌으로 대소헌일고(大笑軒逸稿)가 있고 사적이 삼강행실(三綱行實)과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및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실려 있다.

조준남(趙俊男)
공(公)의 휘(諱)는 준남(俊男)이요 자(字)는 사언(士彦)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으로 명종 2년(1547)에 태어났다.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지절(志節)이 있어 구차하게 얻거나 시속을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효행으로 소격서(昭格署) 참봉에 천거(薦擧)되었으나 기쁜 기색이 없어 그 까닭을 물으니 "우리 집안은 대대로 절의를 지켜 청렴하고 검소한 덕으로 살아왔는데, 내가 벼슬에 뜻을 두어 가문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라고 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에 사람들이 피난하면서 옛날 증자(曾子)도 적이 쳐들어오면 난을 피함이 옳다고 한 고사를 들어 함께 갈 것을 권했으나 공은 "내 평소 글을 읽어 임금께 충성하고 부모께 효도함을 알거늘 어찌 처자식의 안전만 꾀하리오." 하며 마을에 남아 선영을 보살폈다.
선조 30년 정유재란에 왜적들이 민가를 약탈하고, 증조부(曾祖父) 집의공(執義公)의 묘를 파헤치자 공은 적의 칼날 속으로 달려 들어가 흙으로 관을 덮으며 온 힘을 다해 막았다. 적들이 포로로 데려가고자 하여 무진정 아래까지 끌려간 공은 "너희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선조의 묘를 훼손한 불공대천의 원수다. 내어 찌 끌려가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리오." 하고는 북향 사배하고 차고 있던 칼로 자문(自刎)하니 향년 51이다. 놀란 적들이 의로운 사람이라며 옷으로 시신을 덮어주고 떠났다. 이후 사람들은 무진정 아래에서 나는 죽순과 나물을 캐 먹지 않는다. 밀암(密菴) 이재(李裁)는 비명(碑銘)에서 "아버지는 효에 순절하고 아들 또 한 충에 순절하였다. 누가 근원을 열었나. 빛나는 어계(漁溪) 옹(翁)이라네." 라고 하였다. 숙종 32년 나라에서 아들 조계선(趙繼先)과 더불어 부자정려(父子旌閭)를 내려 무진정 경내에 부자쌍절각을 세웠다. 철종 5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고 고종 5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가증(加贈)되었다.

조신도(趙信道)
공(公)의 휘(諱)는 신도(信道)요 자(字)는 중유(仲由)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5세손(世孫)으로 명종(明宗) 갑인(1554)년에 태어났다.
공(公)의 성품(性品)은 강직 (强直)하고 지기(志氣)가 탁월(越)하였다.
일찍부터 한(漢)의 마원(馬援) 장군의 전기를 읽은 후에 말가죽에 시신(屍身)을 싸서 돌아옴이 참다운 대장부라 하더니 무관직(武官職)을 택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온양군수를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선조(宣祖)가 피난길에 올 랐을 때 공은 왕(王)을 의주까지 안전하게 호위(扈衛)하여 공을 세웠다. 퇴각(退却)했던 왜적(倭賊)이 다시 공격하였을 때 공(公)은 한강(漢江)에서 적을 맞아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기력도 다하여 열 손가락이 다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공(公)은 물러나지 않고 준열(峻烈)하게 적을 크게 꾸짖다가 끝내 전사하 고 말았다.
선조(宣祖)가 이 소식을 듣고 애석해 마지않으며 "내가 그런 위험한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장군 덕분이었다.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이 항우(項羽)의 군사에 포위되어 위급했을 때 자기 몸을 희생하여 고조(高祖)를 구출한 장군인들 공(功)이 이보다 크겠느냐." 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였다. 조정에서 호성원종일등훈(扈聖原從一等勳)과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훈(錄勳)하였다.
공(公)은 자식을 두지 못하여 유해(遺骸)를 아무도 수습하지 못하였다. 난(亂)이 평정된 뒤 선산(先山) 아래 초혼장(招魂葬)하였다.
조붕(趙鵬)
공(公)의 휘(諱)는 붕(鵬)이며 자(字)는 대익(大益)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4세손(世孫)으로 중종(中宗) 갑오(1534)년에 태어나 선조(宣祖) 무술(1598)년에 65세로 전사(戰死)하였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공(公)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과 각별(恪別)한 친분(親分)으로 전략(戰略)을 수시로 논의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亂)시에는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으로 울산성(蔚山城)전투에서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선두(先頭)에서 왜적 (倭敵)을 닥치는 대로 격파 (擊破)하고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은 떨어지고 중과부적 (寡不敵)이라 끝내 적(敵)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공(公)은 조금도 굴복(屈伏)하지 않고 도리어 "이 땅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인데 감(敢)히 도이(島夷) 네 놈들이 침범하다니 내 한 칼로 다 무찌르지 못함이 한(恨)이로다." 라며 적(敵)을 크게 매도(罵倒)하였으며 적(敵)의 항복(降伏) 권유(勸誘)에도 눈을 부릅뜨고는 "내가 예의지국(禮儀之國)에 태어나 어찌 네 놈들에게 구차하게 생명(生令)을 연장(延長) 받고자 하겠는가." 라고 소리치니 적(敵)이 공(公)의 입을 찢었으나 그래도 꾸짖기를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학성(鶴城)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조정(朝廷)에서 공(公)의 장(壯)한 충절(忠節)을 알고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증직(贈職)하고 뒤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가증(加贈)하고 삼종질(三從)인 증(贈) 관서공(判書公) 신도(信道)와 함께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하였다.
삼충사(三忠祠)에 친조카(親姪) 고성공(固城公) 응도(凝道), 도곡공(道谷公) 익도(益道)와 같이 삼숙질(三叔姪)을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조탄(趙坦)
공(公)의 휘(諱)는 탄(坦)이요 자(字)는 극평(克平)이며 호(號)는 도암(韜巖)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4세손(世孫)으로 명종(明宗) 임자(1552)년 8월 4일 함안 검암에서 태어나 8세에 조부 내헌공(耐軒公)에게 소학을 배우고 21세에는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을 종유하여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익혔다.
공의 성품은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며 지절이 뛰어났다. 부모의 상(喪)에는 모두 여막을 짓고 3년간 묘소를 지켰으며 임진왜란때 왜적이 부의 묘를 발굴하여 관곽(棺槨)이 노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공은 함안 옹곡으로 달려가 파헤쳐진 관을 지고 낙동강을 건너 구미 인동(仁同) 천생산성(天生山城) 아래 임시 매장해 두고 가족을 청송(靑松)으로 이주시킨 후 동생 방(垹)과 함께 가동(家僮) 수백인과 수백명의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적과 싸웠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시에는 동생 방(垹), 조카 형도(亨道)와 함께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같이 창녕 화왕산성(火旺山 城)에서 적을 막았다.
선조 36년 계묘(1603)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난(亂)이 평정된 후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알려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을 제수(除授)받았고 곧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만년에 함안의 포덕산(飽德山) 아래 은거하여 자연을 벗 삼다가 광해 임자(1612)년 11월 20일 노환으로 수동(洙東)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1이다.
고종 정묘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조방(趙垹)
공(公)의 휘(諱)는 방(垹)이요 자(字)는 극정(克精), 호(號)는 두암(斗巖)이다. 생육신(生六臣)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4세손이다. 명종 12년 정사(1557) 함안 검암에서 태어났다. 황곡 (篁谷) 이칭(李偁) 선생으로부터 수학(受學)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록을 받는 관리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사재를 내어 의병을 일으켜 정암진과 화왕산성에서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적을 막아 큰 공(功) 을 세웠다.
전란(戰亂)이 끝난 후에 공(公)은 자신의 공적(功續)을 내세우지 않고 고향에서 지내니 고을 사람들이 그 충절과 효성에 감복하여 모임을 갖고 장계(狀啓)를 올려서 표창을 받도록 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공(公)은 놀라서 맏아들 위도(衛道)를 보내어 그 문서를 빼앗아 불사르게 하고는 "신하가 나라를 위하고 자식이 부모를 받드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도리다. 표 창이 웬 말이냐. 혹시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공(公)은 할 일을 다 하고도 그 공적(功績)을 내세우지 않았다. 인조 16년 무인년(1638) 돌아가시니 향년 82이다.
공(公)께서는 낙동강 변 두암(斗巖)에 정자(亭子)를 지어 반구정(伴鷗亭)이라 이름 짓고 즐기며 살았다. 이로 인하여 스스로 호(號)를 두암(斗巖)이라 하였다.
선조 40년 정미년(1607) 봄에 공(公)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제현(諸賢)과 중형(仲兄) 식(埴). 조카 임도(任道)와 함께 용화산(龍華山) 아래 낙동강에 배 띄워 강론(講論)한 사실이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에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충효실감(忠孝實鑑)과 가훈팔목장(家訓八目箴)이 있다. 영조 45년 을 축년(1769)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은(李溵)의 장계(狀啓)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