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서면 월송리 산20
- 탐방로그
- 이준용 묘로 가는 길에 위치 안내판이 보이지만, 이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가면 성주이씨의 사당이 나온다. 실제 이준용 묘는 사당을 관리하는 건물의 우측으로 70M 정도 들어가야 찾을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땅은 내 땅이로되 나라를 잃었으니 주인은 나그네 되고 나그네는 주인 되었네. 내 모든 것 혼을 부어 자주독립 밑거름하니 광복의 그 날이 그 날이 오면 춤을 추세 춤을 추세
경신년 회갑 날 옥중에서
경신년 회갑 날 옥중에서
자 교상 교식 교형 교철 교삼 교천
서 안종권
손 선종 영종 정종 익종 경종 예종 무종
서 안종권
손 선종 영종 정종 익종 경종 예종 무종
愛國志士 湖庵 李俊容 先生 功績碑(애국지사 호암 이준용 선생 공적비)
愛國志士 湖庵 李俊容 先生 功績碑(애국지사 호암 이준용 선생 공적비)
애국지사 이준용 선생은 서기 1860년 1월 22일 춘천군 서면 방동리에서 태어나셨으니 본관은 성주요 자는 용서이며 호는 호암으로 품성과 덕행이 온후강직하여 일찌기 한학을 수득하고 동학에 입교하여 정신수양으로 구국운동에 힘쓰셨으니 이는 곧 항일사상으로 이어졌고 일제의 강압이 극렬해진 서기 1904년엔 전답 2만평을 팔아 항일운동자금으로 천도교(교주 손병희)에 헌납하는 등 몸소 실천하는 행동의 수범으로 후학을 가르쳐 후일 독립정신을 널리 고양하는 계기가 되었고 서기 1907년 9월 22일 방동리 의병전투시에는 본가에 의병대장소를 설치하고 침식제공은 물론 의류 의료 지원과 정보의 모집제공 등 전투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로 살신호국의 충정을 불태우니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에 초석이 되었으며 또한 선생께서는 윤도순 박순교 허기준 허현 선생 등과 함께 춘천읍장터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이를 주도하다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당하면서도 서기 1920년 3월 12일 옥중회갑을 맞아 "땅은 내땅이로되 나라를 잃었으니 주인은 나그네되고 나그네는 주인되었네 내 모든것 혼을 부어 자주독립 밑거름하니 광복의 그날이 그날이 오면 춤을 추세 춤을 추세"라는 옥중시를 지어 온겨레의 가슴속에 독립정신을 일깨워주셨고 출옥 후에도 구국의 일념으로 왜경의 감시를 피해 평강 화천 양구 인제 등지를 돌며 젊은이들을 모아 민족의 자주 자립 자위의 애국정신을 고취시키시다 애석하게도 광복을 맞지 못하시고 서기 1945년 2월 20일 86세를 일기로 춘천군 서면 방동리에서 생을 다하시니 서기 1992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의 애국심을 높이 찬양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이에 늦게나마 선생께서 가르치신 민족혼의 높으신 열을 오늘에 되살려 후대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로서 면면히 계승하고자 묘역을 정화하고 이 비를 건립한다.
서기 1992년 11월 일 국가보훈처 광복회 강원도지부 후원, 춘천군수 안구순 근립
서기 1992년 11월 일 국가보훈처 광복회 강원도지부 후원, 춘천군수 안구순 근립
애국지사 이준용 선생의 묘와 공적비를 찾아가는 길이다.
'애국지사 묘소
이준용 선생
건국훈장 애국장
200M→'
위와 같이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이준용 선생
건국훈장 애국장
200M→'
위와 같이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화살표의 방향에는 성주이씨의 사당이 있었다.
안내판이 잘못되어 있다. 실제로는 사당을 관리하는 건물의 우측으로 70미터 정도 들어가야 한다.
獨立鬪士 星州李公 諱 俊容 之墓(독립투사 성주이공 휘 준용 지묘)
공은 농서공 19세손으로 1860년 서면 방동리에서 나시어 한학을 수학하시며 농업에 종사하시다 천도교에 입교하여 교리를 닦으시던 중 1910년 나라가 파망하니 항일구국운동에 몸바치어 향리 독립투쟁의 선봉이 되셨다.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신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전답 2만 여 평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으로 천도교중앙총부에 헌납하셨고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150일간 독립운동운동 수련회에 참여하시는 등 공이 다대하여 교령으로부터 김상천 훈장을 받으셨다. 손병희 선생의 뜻을 따라 윤도선 허현 등과 기미독립선언 감행을 꾀하여 천도교인 수십명을 이끌고 3월 28일 춘천장터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행진하니 천여군중이 환호 합세하여 뜨거운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공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만일년의 옥고를 치루셨는데 법정에서 '빼앗긴 내 나라를 내가 찾겠다는데 무슨 죄가 되느냐'고 일갈하시어 왜인판관의 간담을 서늘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회갑을 맞으심에 찾아간 자손에게 '독립의 서광이 비쳐오는데 여기 있는 것이 오히려 기쁘다'고 흔연해 하셨으니 지사의 풍모에 새삼 숙연해진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1945년 2월에 영면하시니 참으로 애통불금이라 공을 추모하는 정은 날로 더하여 1975년 3월 1일에 강원도지사로부터 독립유공서훈이 있었으며 서면 유지와 방동리민 전원이 공의 뜻을 기리고자 성금을 모아 방동리 입구에 독립투사 추모탑을 건립하였으니 높으신 애국충절은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1987(정묘)년 3월 28일
외손 안경렬 근찬 증손 철순 근립
1987(정묘)년 3월 28일
외손 안경렬 근찬 증손 철순 근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