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 330-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또 옆에 있는 義士 李寅九公 妻 咸安趙氏 烈女碑(의사 이인구공 처 함안조씨 열녀비)
義士 李寅九公 妻 咸安趙氏 烈女碑(의사 이인구공 처 함안조씨 열녀비)
충성과 열행은 만고에 변함없는 인륜의 정도인 바 이를 함께 실행하여 천주에 거울이 되실 분이 이 고장에 계셨으니 이는 곧 여주 이인구공과 그의 아내 함안조씨 부인이시다.
이공은 학사공 망천 선생의 후손으로 1788년에 여항면 두릉 외암마을에서 나시고 조씨 부인은 정절공 어계선생의 후예로 1888년에 가야면 도항리 삼귀마을에서 나시어 20세 때에 이씨문으로 출가 하셨다. 이공은 재질과 용맹이 겸전하고 정의감이 강하며 애국 애족하는 정신이 뛰어나서 기미년 3월 19일 이곳 함안읍에서 있은 독립만세 시위 때에는 이를 모의하고 수천군주의 선두에 서서 조국의 독립을 외쳤다.
이공은 이일로 대구 형무소에서 3년여의 모진 옥고를 겪고 고향에 돌아온 후 왜놈의 탄압과
이공은 학사공 망천 선생의 후손으로 1788년에 여항면 두릉 외암마을에서 나시고 조씨 부인은 정절공 어계선생의 후예로 1888년에 가야면 도항리 삼귀마을에서 나시어 20세 때에 이씨문으로 출가 하셨다. 이공은 재질과 용맹이 겸전하고 정의감이 강하며 애국 애족하는 정신이 뛰어나서 기미년 3월 19일 이곳 함안읍에서 있은 독립만세 시위 때에는 이를 모의하고 수천군주의 선두에 서서 조국의 독립을 외쳤다.
이공은 이일로 대구 형무소에서 3년여의 모진 옥고를 겪고 고향에 돌아온 후 왜놈의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애국정신은 식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놈이 같은 마을의 손씨집 처녀를 밀실에 가두고 농락한다는 말을 듣고 분기 충전하여 달려가서 그 처녀를 위기에서 모면케 하였다.
그러나 야욕을 못 다한 왜경은 그 처녀를 주재소로 연행하기에 다시 이러한 변을 막고 또 관가에 항의하기 위하여 뒤 따라가매 무인지경에 개발지석에 이르러 마침내 원통한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는 1842년 정월 대보름 저녁의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조씨 부인은 달려가서 고성 통곡으로 남편을 영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의 뒤를 것이나 생후 2개월 된 어린 것을 길러 남편의 뒷일을 이을 것과 남편의 원수요 민족의 적인 왜경을 죽여 일본의 만행을 널리 경고 할 것을 생각하여 달려들어 그 곤봉과 돌로서 처서 죽였다.
이 일로 붙들려간 조씨 부인은 일본 관현에게 내 남편 내 나라의 원수를 갚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 하고 항의 하였으나 대구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매 수백 명의 환영 군중의 위로와 칭송을 뒤로하고 남편의 무덤(다리비등/참샘이) 을 찾아 그 날의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니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조씨부인은 어린 아들까지 잃어 슬하에 일점혈육도 남김없이 1948년 3월 7일(음)에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시었다.
이에 온 고을 사람이 정성을 모아 갸륵한 이 부부의 일을 돌에 새겨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하니 이 두 분의 높고 곧은 뜻은 산천과 더불어 빛을 한가지 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놈이 같은 마을의 손씨집 처녀를 밀실에 가두고 농락한다는 말을 듣고 분기 충전하여 달려가서 그 처녀를 위기에서 모면케 하였다.
그러나 야욕을 못 다한 왜경은 그 처녀를 주재소로 연행하기에 다시 이러한 변을 막고 또 관가에 항의하기 위하여 뒤 따라가매 무인지경에 개발지석에 이르러 마침내 원통한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는 1842년 정월 대보름 저녁의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조씨 부인은 달려가서 고성 통곡으로 남편을 영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의 뒤를 것이나 생후 2개월 된 어린 것을 길러 남편의 뒷일을 이을 것과 남편의 원수요 민족의 적인 왜경을 죽여 일본의 만행을 널리 경고 할 것을 생각하여 달려들어 그 곤봉과 돌로서 처서 죽였다.
이 일로 붙들려간 조씨 부인은 일본 관현에게 내 남편 내 나라의 원수를 갚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 하고 항의 하였으나 대구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매 수백 명의 환영 군중의 위로와 칭송을 뒤로하고 남편의 무덤(다리비등/참샘이) 을 찾아 그 날의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니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조씨부인은 어린 아들까지 잃어 슬하에 일점혈육도 남김없이 1948년 3월 7일(음)에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시었다.
이에 온 고을 사람이 정성을 모아 갸륵한 이 부부의 일을 돌에 새겨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하니 이 두 분의 높고 곧은 뜻은 산천과 더불어 빛을 한가지 할 것이다.
1971년 4월 일
여주 이인구공 처 함안조씨 열녀비 건립위원회의 위원장
함안군수 정인무 외 여러 사람이 짓고 세우다
여주 이인구공 처 함안조씨 열녀비 건립위원회의 위원장
함안군수 정인무 외 여러 사람이 짓고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