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항일독립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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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479-1
탐방로그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479-1 하동독립공원에 위치하는 하동항일독립기념탑을 탐방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축 하동독립공원 준공
2014년 3월 1일 국무총리 정홍원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탑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탑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탑
趣旨文(취지문)
하동은 영산 지리산의 정기가 서려있고,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600리 물길이 충무공 얼이 서린 남해바다와 만나는 곳이며, 삶의 터전이 풍요롭고 출중한 인재도 이어지는 자랑스런 고장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노량대첩, 하동에서 태어난 정기룡 장군의 상주대첩과 구국의 위업을 기리는 경충사는 충열의 고장으로 후세의 교육현장이기도 하다.
동학군의 거점지역인 하동 고성산(高城山)을 중심으로 일대의 동학군들이 결집하여 1894년 11월 11일 일본군과 마지막 혈전을 펼치며 186인의 전사자를 내면서 항전하였다. 그 곳에 위령탑을 세우고 매년 그 날을 맞아 추모제를 지내며 원혼을 위로하고 있다.
지리산 일대는 일제강점기에도 의병활동이 왕성하여서 일제에 항쟁한 주요거점이 되었으며 의병 출신 서훈자가 많다. 그러나 지금은 서훈장을 받을 가족을 찾을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진다.
우리고장은 오늘날까지 50여분의 독립운동 서훈자가 있으시다. 앞으로도 현창사업을 추진하면서 서훈자로 추서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할 것이다.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져 나온 함성 대한독립만세!! 3월 18일(음력 2월 17일)에는 朴致和(박치화) 선생과 함께한 12인의 서명으로 만들어진 하동의 독자적인 대한독립선언서가 있었다. 그 뜻은 그 날에 하동장터에서 소금가마니를 쌓아 연단을 만들고 운집한 군민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로 목 터지게 외쳤으며 그 함성은 이내 이웃장터와 인근지역으로 이어졌다. 뒤늦께 찾은 원본은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있다.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대한독립선언문인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인의 유림대표로 참여한 정규영(鄭圭榮) 선생과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모금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 재산을 다 받친 정재완(鄭在浣) 선생 부자의 애국정신은 후세에까지 귀감이 되고 있다.
1920년 하동청년회가 창립되었다. 1927년에는 청년회관이 건립되면서 청년운동과 민족정기를 일깨우는데 지역의 거점이 되었으나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공회당으로 사용되었다. 해방후에는 교육,문화시설로 활용되어오다 1971년 본래의 취지로 되찾게 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당시에 건립되었던 전국의 청년회관은 멸실되었으나,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곳은 하동이 유일하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독립운동의 혼이 서린 역사의 고장으로 선현들의 숭고한 애국 애족 정신을 기리며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하동독립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이곳은 운기가 서린 역사의 현장이 되어서 찬연한 빛과 향기를 품으며 하동과 함께 영원하게 될 것이다.
하동독립운동기념탑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사적과 애향정신을 선양 계승코저 하는 하동인의 뜻을 경내에 새겼다.
우리고장 하동을 애국과 애향의 고장으로 더욱 발현되도록 기리며 빛내자!
하동독립공원에 담긴 정신을 새기면서 역사의식 애향정신 국권회복 통일염원의 큰 가치를 선도하고 실현하자.
2013년 3월 1일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
회장 李洙鍾(이주종) 근서
獻詩(헌시)

우리 역사와 함께 영원하라

오늘, 우리는
하동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동광(東光)의 언덕에서, 옷깃을 여미나니
그날 피맺힌 외침과 함성,
태극기 물결 속에 들리도다.

-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
침략자 종말에 맞서
오로지 구국(救國)의 일념(一念),
호국 영령이시여, 순국선열이시여.

조국과 겨레,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혼의 푸른 충절이 아니겠는가.
민족 정기·민족 기상·민족 기개
여기 새긴 이름마다
우리 역사와 함께 영원하라

- 호국 영령이시여, 순국선열이시여.

2013년 3월 1일
삼가 정두수 바침

獻詞(헌사)
1945년 8월 15일, 日帝(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祖國光復(조국광복)이 되어 36년간의 의 역사를 박차고 일어섰던 그 때의 감격이 歲月(세월)의 흐름 속에서 절차 잊혀져가고 있는 現室(현실)이다.
우리가 祖國(조국)을 되찾아 政府樹立(정부수립)을 하고 민주정치와 경제를 發展(발전)시킨 것은 광복을 위해 生命(생명)을 바치고 투쟁한 先烈(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이 그 原動力(원동력)이였을 어찌 잊어서 되겠는가.
이에 여러 河東(하동)의 뜻있는 분들이 河東人(하동인)의 애국정신과, 하동인의 不屈(불굴)의 정열과, 하동인의 高貴(고귀)한 희생을 자손만대의 龜鑑(귀감)으로 삼고자 李洙鍾(이주종) 회장을 앞세워 이곳에 하동독립공원을 造成(조성)하는 일은 靑史(청사)에 빛나고 後代(후대)에 길이 남을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보건대, 조국 위해 목숨 바친 先烈(선열)과 피땀 흘리신 志士(지사)님들의 희생은 참으로 위대하셨나니, 여기 光復(광복)의 빛 다시 밝히며 連綿(연면)이 이어질 河東人(하동인)의 항일독립정신에 머리 숙여 獻詞(헌사)를 봉헌하나이다.
2013년 3월 1일
光復會長(광복회장) 朴维徹(박유철)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의 손자)

慶祝辭(경축사)
섬진강 물굽이가 남해바다에 다다르면서 하동 땅에 그 영기를 스며들게 하였기 때문인가. 백두대간의 우람찬 맥이 하동 땅에 이르러 반도의 정기가 하동 땅에 응축되었음인가.
이 명기와 정기가 하동인의 정기가 되고 정신이 되었기에 예부터 이곳엔 제제다사의 인걸이 줄을 이어 태어났음이 아닌가.
특히 나라를 빼앗겨 수난이 혹심할 때 하동인은 재산의 수탈, 신변의 위해를 무릅쓰고 분연히 침탈자 일제에 대결하여 항거하였다.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대한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김규식 선생을 민족대표로 파견할 때 전국 137명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자 중 하동인도 참여하였다. 또한 1894년 동학농민항쟁의 최후의 전장이었던 한(恨) 맺힌 현장인 고성산(高城山) 하동에 위치한다.
특히 독립운동 서훈자만도 현재 50여명에 이르고 있음은 하동인의 명예요 자긍심이다.
하동에는 1919. 3. 18일 하동장날을 기하여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12인이 서명한 하동의 독자적인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원본도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 지방독립운동의 중요한 사료이다.
하동항일청년회를 중심으로 하동열혈청년들의 지속적인 항거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특히 타 지역에서는 당시의 청년회관은 흔적도 찾기 어려운데 이를 관리 보존하고 있는 사실만도 하동인을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하동 땅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간추려 청년회관 튀 편 언덕에 하동인의 정기를 발양하고 정신을 우뚝 세워 영원히 하동인의 긍지와 심주가 되도록 하동독립공원을 조성하는 일은 매우 뜻 깊은 일이며 장한 일이다. 하동이여 영원히 발전하라!
하동인이여 애국 애향의 정신을 영원히 기리길 바란다.
축원하는 마음을 드리게 되는 본인에게는 한없는 영예가 아닐 수 없다.
2013년 3월 1일 李鍾贊(이종찬) 드림
(조부 6형제 망명독립투쟁가족 후손)
하동 독립유공 서훈자 명단
애국장 - 공준서, 김의홍, 박광선, 박인환, 박홍지, 손몽상, 임봉구, 정맹도, 조기섭
애족장 - 강우석, 권대형, 김기범, 김재영, 김홍권, 박내홍, 박영묵, 박치화, 백운룡, 손기혁, 송재홍, 신만종, 신현중, 이경호, 이도윤, 이병도, 이세기, 이종인, 정남시, 정몽석, 정상정, 조무준, 조정래, 조학제, 최제학
건국포장 - 이정수, 정규영
대통령표창 – 문공학, 박문화, 이강률, 이범호, 이재기, 이홍식, 임만규, 정낙영, 정섬기, 정성기, 정세기, 정재기, 정재욱, 정재운, 추홍순, 하일로
有功(유공)
국가보훈처 하동군수 조유행, 경상남도 국회의원 여상규, 재부하동향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