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화 공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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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97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운동 지도자 일산 박치화(一山朴致和, 1880.7.11~1947.7.5)는 1919년 3월 18일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영호남 지역 만세운동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은 조선 고종17년(1880)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에서 밀양박씨 가문 박영수와 성산 이씨 이인엽의 3남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으며, 1896년 17세 때 영월 엄재현과 혼인했다.
이 청렴하고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했다.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공은 면장직을 그만두고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국권 회복에 나섰다. 1919년 3월 18일 공은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공을 비롯해 정낙영(금남면), 정인영, 이성우(횡천면), 이범호(양보면), 박종원(회천면), 이병홍(양보
독립운동 지도자 일산 박치화(一山 朴致和, 1880.7.11.~1947.7.5.)는 1919년 3월 18일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영호남 지역 만세운동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公)은 조선 고종 17년(1880)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에서 밀양 박씨 가문 박영수와 성산 이씨 이인엽의 3남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으며, 1896년 17세 때 영월 엄씨 엄재현과 혼인했다.
공(公)은 강직한 성품으로 시류에 따르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았으며, 하동군 적량면 면장직에 있을 때는 한결같이 청렴하고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했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공(公)은 면장직을 그만두고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국권 회복에 나섰다. 1919년 3월 18일 공(公)은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공(公)을 비롯해 정낙영(鄭洛榮, 금남면), 정인영(鄭寅永) 이성우(李聲雨, 횡천면), 이범호(李範鎬, 양보면), 박종원(朴宗源, 횡천면), 이병홍(李炳鴻, 양보
면), 정희근(鄭禧根, 금남면), 김응탁(金應鐸, 적량면), 이보순(李補淳, 하동읍), 황학성(黃學成(性), 하동읍), 김두순(金斗淳, 하동읍)이 서명한 후 하동 장터에서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독립선언서가 선포되면서 하동 지역에서는 만세운동이 모두 17회 일어났고, 연인원 1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17명이 사망하고 95명이 부상을 입었고 50명이 투옥되었다. 하동에서 선포된 '대한독립선언서'는 2015년에 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로 지정되어 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공(公)은 만세운동 후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아우 박문화(朴汶和)도 1919년 4월 7일에 하동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전주법원에서 곤장을 맞는 태형 90도를 받았다. 아들 박성무(朴性茂) 역시 전라북도 정읍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1934년 9월 17일 전주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는 등 한집안에서 3인이 옥고를 치렀다. 공(公)은 출옥한 뒤에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10월에 상해 임시정부의 법무원 법률판리사(法律辦理事), 경상남도찰리사(慶尙南道察理使)', 재무모집기주원(財務募集記主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법무.군무.재무를 통괄하여 맡은 것으로,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1945년 8월 15일에 마침내 국권을 회복하자 공(公)은 민족지도자 여운형(呂運亨)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으나,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1947년 7월 5일 68세에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公)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 현충원 제4묘역 117호에 안장했다. 공(公)은 6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성락, 성용, 성완, 성무, 청웅, 성규이고 딸은 성숙, 성남이다. 아우 박문화 역시 1998년에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 470호에 안장했다. 박문화는 3남을 두었으며, 성호, 성극, 성민이다.
면), 정희근(금남면), 김응탁(적량면), 이보순(하동읍), 황학성(하동읍), 김두순(하동읍)이 서명한 후 하동 장터에서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독립선언서가 선포되면서 하동 지역에서는 만세운동이 모두17회 일어났고, 연인원 1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17명이 사망하고 95명이 부상을 입었고 50명이 투옥되었다. 하동에서 선포된 '대한독립선어'는 2015년에 국가지정 기록물 제12호로 지정되어 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공은 만세운동 후 체포되어 대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아우 박문화도 1919년 4월 7일에 하동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전부법원에서 곤장을 맞는 태형 90도를 받았다. 아들 박성무 역사 전라북도 정읍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1934년 9월 17일 전주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는 등 한 집안에서 3인이 옥고를 치렀다. 공은 출옥한 뒤에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10월에 상해 임시정부의 법무원 법률판리사, 경상남도찰리사, 재무모집기주원(財務募集記主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법무.군무.재무를 통괄하여 맡은 것으로,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1945년 8월 15일에 마침내 국권을 회복하자 공은 민족지도자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으나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1947년 7월 5일 68세에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제4묘역 117호에 안장했다. 공은 6남 2녀를를 두었는데, 아들은 성락, 성용, 성완, 성무, 청웅, 성규이고 딸은 성숙, 성남이다. 아우 박문화 역시 1998년에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 470호에 안장했다. 박문화는 3남을 두었으며, 성호, 성극, 성민이다.
공훈비는 윤상기 하동 군수와 신재범 군의회 의장이 지원하고, 정재상 사학자가 공훈을 발굴하엿으며, 정연가 비 건립 추진위원장과 위원들이 협력한 데에, 박치화 선생의 손자 박철신, 종손자 박명신의 노력이 더해져 완성되었다. 또한, 나라를 위해 현신한 공(公)의 뛰어난 공적을 다음 세대에 길이 전하고자 하동군민이 뜻을 모았다.
이 비문은 일제강점기 기록물인 「대구복심법원」 박치화 판결문(1919)과 국가보훈처가 발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2009),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1920), 임시정부가 발행한 「박치화 신임장」(1927) 외 15종의 기록물을 참고하여 작성하고 깊이 새겼다.
2020년 월 일 (삼일운동 101주년)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이 비문을 짓고, 완석 정대병이 쓰고, 하동군민이 비를 세우다.
공훈비는 윤상기 하동군수와 신재범 군의회 의장이 지원하고, 정재상 사학자가 공훈을 발굴하였으며, 정연가 비 건립 추진위원장과 의원들이 협력한 데에, 박치화선생의 손자 박철신, 종손자 박명신의 노력이 더해져 완성되었다. 또한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의 뛰어난 공적을 다음 세대에 길이 전하고자 하동군민이 뜻을 모았다.
이 부문은 일제강점기 기록물인 「대구복심법원」 박치화 판결문(1919)과 국가보훈처가 발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2009),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1920), 임시정부가 발행한 「박치화 신임장」(1927)외 15종의 기록물을 참고하여 작성하고 깊이 새겼다.
2020년 월일(삼일운동 101주년)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이 비문을 짓고, 완석정대병이 쓰고 하동군민이 비를 세우다.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975-1 두전마을 입구 독립운동지도자 박치화 선생 공훈비를 찾았다.
독립운동가 박치화 선생 공훈비
독립운동지도자 박치화 공훈비
독립운동지도자 박치화 공훈비
독립운동지도자 박치화 공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