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기적비

4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173-5
탐방로그
이 비석은 하동군 양보면 출신 독립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으며, 이들의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향기념비

정진효애향공덕비

전사과 박공필종 시혜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173-5 양보공원에 양보면 출신 항일독립운동 기적비를 찾았다.
抗日獨立運動紀蹟碑(항일독립운동기적비)
抗日獨立運動紀蹟碑(항일독립운동기적비)
抗日獨立運動紀蹟碑(항일독립운동기적비)
공훈약사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가정을 버리고 오직 독립운동에 몸 바친 우리 고향이 배출한 영웅이고 선각자이신 구국의 항일독립공훈자의 약사를 여기 남깁니다.

김용실(金容實) 1928.6.3. ~ 2002.2.19. 본적 양보 감당리 84
1943. 진주공립학교 재학 중 광명회를 조직하시였다. 1944.9월 학생들과 같이 진해비행장 건설공사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독립사상을 전파하다 동년 9월 23일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부산지검에 이송된 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시었다. ※ 2010년 대통령표창 추서되시었다.

김홍권(金弘權) 1892.1.25. ~ 1937.1.8. 본적 양보 운암리 115
1909.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국내외로 활동하시었으며 1919. 상해임시정부 재무위원(현 재무부장관)으로 피임되었으며 동년 4월 23일 24일에 개최된 임시의정원 제2차 회의에 의정원의원(현 국회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제4차 5월 6일 회의에서는 경상도 구급의연금위원으로 선임되어 영남권 독립운동 자금책으로 활동하시였다.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960년 대통령표창 추서되시었다.

박내홍(朴來洪) 1897.10.11 ~ 1937.6.28. 본적 양보 운암리 603
1919.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되자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발행의 공채증권으로 모금 중, 1920.11. 기원필에게 1천원권 공채 1장과 1백원권 공채 2자을 우송과정에 일경에 발각되어 피체되시었다.
1921.6.10.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시었고 1935.7.11. 경성지방법원 정치범처벌령 위반으로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루시었다. ※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되시었다.
이재기(李載基) 1874.5.2. ~ 1952.2.10. 주소 양보 통정리 269
1919.3.21. 횡천면 여의리에서 문공학과 1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 후 시위를 하였으며, 복권 직전에서 문공학과 함께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경찰지서)를 습격하다 체포되시었다. 1919.5.3.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받았다. ※ 1993년 대통령표창 추서되시었다.

정섬기(鄭暹基) 1895.12.26. ~ 1954.7.24. 본적 양보 장암 600
1919.4.23. 당시 양보 일신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정성기(鄭成基) 이경호(李璟鎬)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하동장날 만세 시위를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 징역 6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 1992년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시었다.

정성기(鄭成基) 1886.4.23. ~ 943.6.11. 본적 양보 장암리
1919.3.23. 하동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7~8백명 장꾼과 시위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시었다.
1919.5.27.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시었다. ※ 2002년 대통령표창 추서되시었다.

이범호(李範鎬) 1883.2.10. ~ 1956.1.10. 본적 양보 장암리 866
1919.3.20. 남해읍 장날 시위계획을 세우고 독립선언서 대량 등사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여 남해시장에서 태극기를 배포하여 시위를 주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20.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보안법위반으로 태형을 받았으며, 5.17.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언도받아 옥고를 치루시었다. ※ 1992년 대통령표창 추서되시었다.

이병도(李丙燾) 1923.5.11. ~ 1991.11.21. 본적 양보 통정리 347
1940.11.23.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경남, 부산, 울산) 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에 불복하여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 등을 외치며 시가행진 후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대좌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고 가옥을 파괴한 주동자로 지목되어 (당시 부산제2상업학교 5학년) 일경에 체포되었다.
1941.6.7.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 옥고를 치루시었다. ※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되시었다.

이세기(李世基) 1923.10.23. ~ 1976.1.3. 본적 양보 우복리 1265
1940.11.23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일본 심판진의 편파적 판정에 분노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일본놈 죽여라." 라는 구호 등을 외치며 심판관 경남위수사령관 대좌 노다이 관사를 습격 파괴한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체포되시었다. (당시 제2상업학교 4학년)
1941.6.7 대구복심병원에서 징역8월 선고받고 1년여 옥고를 치루시었다. ※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되시었다.
이재기(李載基) 1874.5.2. ~ 1952.2.10. 주소 양보 통정리 269
1919.3.21. 횡천면 여의리에서 문공학과 1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 후 시위를 하였으며, 복권 직전에서 문공학과 함께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경찰지서)를 습격하다 체포되시었다. 1919.5.3.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받았다. ※ 1993년 대통령표창 추서되시었다.

정섬기(鄭暹基) 1895.12.26. ~ 1954.7.24. 본적 양보 장암 600
1919.4.23. 당시 양보 일신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정성기(鄭成基) 이경호(李璟鎬)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하동장날 만세 시위를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 징역 6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 1992년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시었다.

정성기(鄭成基) 1886.4.23. ~ 943.6.11. 본적 양보 장암리
1919.3.23. 하동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7~8백명 장꾼과 시위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시었다.
1919.5.27.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시었다. ※ 2002년 대통령표창 추서되시었다.

이범호(李範鎬) 1883.2.10. ~ 1956.1.10. 본적 양보 장암리 866
1919.3.20. 남해읍 장날 시위계획을 세우고 독립선언서 대량 등사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여 남해시장에서 태극기를 배포하여 시위를 주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20.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보안법위반으로 태형을 받았으며, 5.17.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언도받아 옥고를 치루시었다. ※ 1992년 대통령표창 추서되시었다.

이병도(李丙燾) 1923.5.11. ~ 1991.11.21. 본적 양보 통정리 347
1940.11.23.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경남, 부산, 울산) 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에 불복하여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 등을 외치며 시가행진 후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대좌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고 가옥을 파괴한 주동자로 지목되어 (당시 부산제2상업학교 5학년) 일경에 체포되었다.
1941.6.7.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 옥고를 치루시었다. ※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되시었다.

이세기(李世基) 1923.10.23. ~ 1976.1.3. 본적 양보 우복리 1265
1940.11.23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일본 심판진의 편파적 판정에 분노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일본놈 죽여라." 라는 구호 등을 외치며 심판관 경남위수사령관 대좌 노다이 관사를 습격 파괴한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체포되시었다. (당시 제2상업학교 4학년)
1941.6.7 대구복심병원에서 징역8월 선고받고 1년여 옥고를 치루시었다. ※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되시었다.
정승유(鄭勝有) 미상 ~ 1908.12.16. 본적 양보 박달리 봉곡
1908.12. 의병장으로 활약 중 악양 매계 수비대는 지리산 일대 의병을 체포하기 위해 14일간 수색작전을 전개하여 정승유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정승유는 옥을 부수고 탈옥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 중 봉곡촌 교전 중 일본군에 피살되어 순국하시었다. ※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시었다.

이병홍(李炳鴻) 1896. ~ 1919. 본적 양보 박달리
1915.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남과기대) 3년 졸업 후 하동읍 대서소 운영 1919.3. 박치화, 이범호, 정낙영 등 12명과 자신이 운영하는 대서소에 모여 대한독립선언서(하동분, 현 독립기념관 본관)를 작성하여 3월 18일 하동장날 만세시위를 벌였다가 주동자로 몰려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감옥에서 병을 얻어 출옥 3일만에 세상을 떠나시었다. 향년 24세였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땅은 선조님들의 애향과 충(忠)이 이어져온 비옥한 땅과 청동기시대부터 살아온 조화로운 땅이다. 옛 어른의 구국행적을 교훈삼고 후손에게 선현의 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여기 항일독립운동 기적비를 세우니 세세손손 그 뜻을 받들고자 면민의 뜻을 모아 여기 약사(略史)를 남겨 님들의 충혼을 받드오니
영령이시여! 평안히 길이 영명하시옵소서.

2019.6.5. 추진위원장 하암 성금성 짓고 호정 김진권 쓰고 면장 김종영(화개) 면민과 함께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