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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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통영시 무전동 357
탐방로그
경남 통영시 무전동 시청 정문 앞산 묘소 옆에 있다는 애국지사 국한 김철호 선생 공적비를 찾아왔다. 안내판도 없고 올라가는 길도 없다. 가파른 암벽을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내려와서 보니, 통영 시청에서 건널목을 건너 조금 직진해서 올라가는 길이 쉬운 길이 있었다. 해당 묘역에는 선생과 선생의 가족 분들의 묘소가 있고, 묘소 옆에는 공적비가 위치한다. 국한 김철호 선생은 광복 후 반민특위로 활약하던 중 6.25 발발 후 괴한들에 의하여 끌려가서 소식이 없으시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길이 흠모하리라.
1995년 11월 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문학박사 신재홍 근찬
국전심사위원 김영기 전개
한국서예고시협회 고시위원 문관효 근서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 회장 김영준 근수
노직 통정대부 김공지묘, 부인 경주이씨 祔于右(부우우). 이분은 국한 선생의 8대조 되시는 분이라고 한다.
내려와서 보니, 통영시청에서 건널목을 건너 조금 직진해서 올라가는 길이 쉬운 길이 있었다.
경남 통영시 무전동 시청 정문 앞산 묘소 옆에 있다는 애국지사 국한 김철호 선생 공적비를 찾아왔다.
안내판도 없고 올라가는 길도 없다. 가파른 암벽을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묘소 옆에 있는 애국지사 국한 김철호 선생 공적비
애국지사 국한(國汗) 김철호 선생 공적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43-1-4호 / 소재지 : 경남 통영시 무전동 281-2
이 공적비는 의열단 가입 및 신간회 통영지회 소속으로 군자금 등 항일독립운동을 한 김철호(金哲鎬 :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립되었다. 김철호 선생은 중국 광동 (廣東)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재학 중인 1926년 8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맡았다. 이 무렵 의열단은 근거지를 상해에서 광동지역으로 옮겨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越韓國革命同志會)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민족전선의 통일운동에 앞장서 나갔다. 그 후 국내활동의 임무를 부여받아 귀국한 그는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고 전국 각처에 신간회 지회가 설립될 때,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충무간사와 서무부의 일을 맡는 등 신간회 통영지회를 중심으로 표면활동을 벌이는 한편 비밀리에 동지를 포섭하면서 의열투쟁의 계획을 추진해 갔다. 그러던 중 1928년 6월 중국에서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서응호(徐應浩)가 귀국하자 마침 열리게 된 박람회를 기회로 삼아 일대 거사를 계획하다가 1929년 10월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9년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愛國志士 國汗 金哲鎬 先生 功績碑(애국지사 국한 김철호 선생 공적비)
여기 외세의 압박으로 한민족의 존립이 위기에 처한 역사의 현장에서 국권회복과 민족정기 확립에 온몸을 불살라 애국의 참모습을 보인 한 지사가 있으니 바로 국한 김철호님이다. 님은 이땅에 일제의 마수가 뻗쳐오던 1901년 통영시 태평동에서 부 김윤일과 모 김녕김씨 순과의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다. 님은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인이며 고려말 판도판서에 오른 김관은 님의 19대조이고, 조선조 직필사관 김일손은 님의 13대조이다. 님은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이 굳세어 일제의 압정이 날로 심해지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신학문에 접하였다. 1925년 경성협성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그해 다시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동남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광동 중산대학으로 적을 옮겨 김규선 장지락과 함께 항일단체인 유영한국혁명동지회에 입회하였다. 그해 8월 의열단장 김원봉과 단원 오성륜등과 항일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의열단에 입단하여 최하청 진공목과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28년 의열단으로 부터 일제의 침략 원흉을 처단하고 국내에 지하조직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님은 통영에서 항일투쟁의 민족 유일 전선을 구축한 신간회 통영지회를 조직하여 총무간사로 활약하니 회원이 90여명에 이르렀다. 1929년 경성 조선박람회 개최를 기회로 서응호 윤충식등과 일제 요인 암살과 주요기관 파괴를 기도하다가 서응호 윤충식과 왜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겪었으며 김원봉 등 17명의 동지들은 미체포로 기소중지되었다. 출옥 후 계속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45년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9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일제 때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특별처벌법을 공포하여 님을 경상남도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으로 임명하였다. 1950년 6.25의 발발로 고향에 칩거하던 중 그해 8월 14일 아깝게도 참화당하였다. 님은 경주 김씨 선희와 결혼하여 아들 용민 용인과 따 경연 경자 경숙 5남매를 두고 손자 태우 태희 태성 태영 성주 성영을 두었다. 1995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니 님이 돌아가신 후 45년 만에 비로소 우국충절과 애국애족의 활약상이 빛을 보게 되었다. 님은 일제 침략하에서는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한 충의의 기백과 희생 봉사로 젊음을 바쳤고 광복 후에는 민족정기의 확립을 위해 온 몸을 던졌으니 천고 후에라도 님의 애국애족 정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