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399-4
- 탐방로그
- 주기효 선생은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 양성,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 운동의 지도자 양성, 애국 교과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 과외 활동을 통한 애국 사상의 함양, 교육 실천을 통한 배일 운동을 실천하기 위헤 사립학교인 개통학교를 만들고 운영하셨다고 한다. 현재 개통학교는 곰내유치원이 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비문(碑文) 내용
[ 전면 내용(건립 당시의 위치로 현재의 후면) ]
熊川私立開通學校 設立者 石泉 先生 朱基孝 功績碑 / 웅천사립개통학교 설립자 석천 선생 주기효 공적비
[ 좌측면 내용 ]
前 熊川私立開通學校 學友 一同 / 전 웅천사립개통학교 학우 일동
[우측면 내용(소화 십육년-1941년)]
昭和 拾六年 九月 日 建立 / 소화 십육년 구월 일 건립
[후면 내용(건립 당시의 위치로 현재의 전면)]
光武 隆熙 年間 嶠南一帶 初代 維新 敎育家 中 第一人也 / 광무 융희 연간 교남일대 초대 유신 교육가 중 제일인야
實績 不知有私 但知有校 閱歲十餘 育英千數 / 실적 부지유사 단지유교 열세십여 육영천수
槪讚 憂時先覺 臨機達觀 明暗同道 窮通一貫 / 개찬 우시선각 임기달관 명암동도 궁통일관
대한제국 광무년(고종 345년, 서기 1897년)부터 융희년(순종 3년, 서기 1910년) 사이에 교남(영남)일대의 초대 신식 교육자 가운데 첫째가는 분이시다. 하신 일은 "사사로움을 알지 못하시고 오직 학교만을 위하시더니 개교 10여년에 영재 천여명의 길러내셨다." 이에 모두들 칭송하니 나라가 걱정스러울 때 앞장서서 새문명을 깨우치시어 좋을때나 어려울때에도 교육에 한길이셨고 출세영달의 기회가 있어도 마다하시고 생각이 깊어셔서 같은 길을 걸어셨다.
[ 전면 내용(건립 당시의 위치로 현재의 후면) ]
熊川私立開通學校 設立者 石泉 先生 朱基孝 功績碑 / 웅천사립개통학교 설립자 석천 선생 주기효 공적비
[ 좌측면 내용 ]
前 熊川私立開通學校 學友 一同 / 전 웅천사립개통학교 학우 일동
[우측면 내용(소화 십육년-1941년)]
昭和 拾六年 九月 日 建立 / 소화 십육년 구월 일 건립
[후면 내용(건립 당시의 위치로 현재의 전면)]
光武 隆熙 年間 嶠南一帶 初代 維新 敎育家 中 第一人也 / 광무 융희 연간 교남일대 초대 유신 교육가 중 제일인야
實績 不知有私 但知有校 閱歲十餘 育英千數 / 실적 부지유사 단지유교 열세십여 육영천수
槪讚 憂時先覺 臨機達觀 明暗同道 窮通一貫 / 개찬 우시선각 임기달관 명암동도 궁통일관
대한제국 광무년(고종 345년, 서기 1897년)부터 융희년(순종 3년, 서기 1910년) 사이에 교남(영남)일대의 초대 신식 교육자 가운데 첫째가는 분이시다. 하신 일은 "사사로움을 알지 못하시고 오직 학교만을 위하시더니 개교 10여년에 영재 천여명의 길러내셨다." 이에 모두들 칭송하니 나라가 걱정스러울 때 앞장서서 새문명을 깨우치시어 좋을때나 어려울때에도 교육에 한길이셨고 출세영달의 기회가 있어도 마다하시고 생각이 깊어셔서 같은 길을 걸어셨다.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399-4 곰내유치원(구 웅천초, 항일운동유적지 '개통학교' 터)에 위치한 주기효 선생 공적비를 찾았다.
문화재명 : 창원 진해 주기효 비(비지정문화재)
熊川私立開通學校 設立者 石泉 先生 朱基孝 功績碑
웅천사립개통학교 설립자 석천 선생 주기효 공적비
웅천사립개통학교 설립자 석천 선생 주기효 공적비
前 熊川私立開通學校 學友 一同
전 웅천사립개통학교 학우 일동
전 웅천사립개통학교 학우 일동
昭和 拾六年 九月 日 建立
소화 십육년 구월 일 건립(1941년 9월 건립)
소화 십육년 구월 일 건립(1941년 9월 건립)
明德齊(명덕재)1906년 개교, 웅천초등학교 설립자이신 근대교육의 선각자 주기효 선생 공적비
1906년 개교, 웅천초등학교 설립자이신 근대교육의 선각자 주기효 선생 공적비
주기효(朱基孝, 1877~1941) 웅천 북부 출생. 자(字)는 우원(于願), 아호(雅號)는 석천(石泉). 일찌기 근대교육기관으로서 1906년 웅천사립개통학교(熊川私立開通學校)와 여자전문학교인 숙명의숙(淑明義塾)을 설립, 웅천의 후진들을 위한 육영사업을 한 선각자이다.
더 많은 교양과 지식을 보급하고자 웅천도서원(熊川圖書阮)을 개설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책을 빌려 주며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도록 권장하였다. 실업조합(實業組合)과 흥업조합(興業組合)등을 설립하여 민족실업 진흥운동을 전개 하기도 하였다. 이 공적비는 웅천의 국도변에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41년 9월에 세운 것으로 1873년 11월에 어지럽게 관리되고 있는 공적비를 안타깝게 생각한 당시 김준봉 웅천동장이 웅천초등학교의 설립자 공적비이기에 사비를 들여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왔다.
주기효(朱基孝, 1877~1941) 웅천 북부 출생. 자(字)는 우원(于願), 아호(雅號)는 석천(石泉). 일찌기 근대교육기관으로서 1906년 웅천사립개통학교(熊川私立開通學校)와 여자전문학교인 숙명의숙(淑明義塾)을 설립, 웅천의 후진들을 위한 육영사업을 한 선각자이다.
더 많은 교양과 지식을 보급하고자 웅천도서원(熊川圖書阮)을 개설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책을 빌려 주며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도록 권장하였다. 실업조합(實業組合)과 흥업조합(興業組合)등을 설립하여 민족실업 진흥운동을 전개 하기도 하였다. 이 공적비는 웅천의 국도변에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41년 9월에 세운 것으로 1873년 11월에 어지럽게 관리되고 있는 공적비를 안타깝게 생각한 당시 김준봉 웅천동장이 웅천초등학교의 설립자 공적비이기에 사비를 들여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