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동3.1독립운동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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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양동 4-3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비문에 쓰여있는 주기용 선생은 주기철 목사의 사촌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지만 공훈록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웅동 3·1독립운동기념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2-1-38 / 관리자 : 창원시 / 위치 : 창원시 진해구 남양동 4-38 치
기미년(1919년) 4월 3일 마천동 냇가에서 우리고장 민족정신의 산실인 "계광학교" 교사 주기용 선생을 비롯한 시민과 학생 3,000여명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킨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고자 1986년 두동에 비를 건립하였으나, 주변여건의 변화와 노후로 인해 독립만세운동 발원지 인접 남양동에 이전 건립하여 2009년 1월 27일 준공 되었다.
3·1독립운동 당시의 민족기상과 나라사랑을 드높인 자랑스런 우리 고장의 역사적 사실을 기리고, 선열의 숭고한 뜻과 얼을 받들어 항일민족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부지 1,040㎡, 높이 22m, 탑 뒤편 외곽에 기미독립선언문이, 탑 기둥에는 건립기가 새겨져 있다.
여기 우리민족의 강렬한 조선독립의 함성이 메아리친 역사의 고장 1919년 기미년 4월 3일, 일제의 서슬 시퍼런 총칼 앞에 누구도 굴하지 않았다. 주기용, 이부근, 김일성, 배종인, 배건수, 이동개, 정운조, 문석주, 김병화 그리고 이 고장 웅동지역의 3,000여 애국지사들 그 애국심, 그 절개, 그 의기 영원히 겨레의 가슴속에 등불이 되리
건립기
기미년 4월 3일 마천동 냇가에서 주기용 선생을 비롯한 이 고장 3,000여 애국지사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고자 1986년 이 고장 출신 인사들의 성금으로 두동산 263-3번지에 세웠으나 그로부터 23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주변 여건의 변화와 노후로 이곳 남양동에 사업비 5억원을 들여 2008년 9월 30일 착공하여 2009년 1월 27일 준공하였습니다. 2009년 1월 27일 진해시장 이재복
작품명 : 영원한 비상 / 재료 : 화강석, 브론즈 / 높이 : 22M / 시공자 : ㈜산인종합건설 / 조각가 : 김성민
기미독립 선언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仗)하야 차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誠忠)을 합하야 차를 포명(布明)함이며 민족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 발전을 위하야 차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發露)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순응병진(順應幷進)하기 위하야 차를 제기함이니 시(是)이 천(天)의 명명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공존 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천하 하물(何物)이던지 차를 저지 억제치 못할 지니라.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작(作)하야 유사 이래 누(累) 천년에 처음으로 이민족 겸제(箝制)의 통고(痛苦)를 상(嘗)한지 금(今)에 십년을 과(過)한지라 아(我) 생존권의 박상(剝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심령상 발전의 장애됨이 무릇 기하이며 민족적 존영의 훼손됨이 무릇 기하이며 신예와 독창으로써 세계 문화의 대조류에 기여 보비(補裨)할 기연(奇緣)을 유실(遺失)함이 무릇 기하이뇨.
희(噫)라! 구래(舊來)의 억울을 선창하려 하면, 시하(時下)의 고통을 파탈(擺脫)하려 하면, 장래의 협위(脅威)를 삼제(芟除)하려 하면, 민족적 양심과 국가적 염의(廉義)의 압축소잔(壓縮銷殘)을 흥분 신장하려 하면, 각개 인격의 정당한 발달을 수(遂)하려 하면, 가련한 자제에게 고치적 재산을 유여(遺與)치 아니하려 하면, 자자손손의 영구 완전한 경복(慶福)을 도영(導迎)하려 하면, 최대 급무가 민족적 독립을 확실케 함이니 이천만 각개가 인(人)마다 방촌(方寸)의 인(刃)을 회(懷)하고 인류 통성과 시대 양심이 정의의 군(軍)과 인도의 간과(干戈)로써 호원(護援)하는 금일 오인(吾人)은 진(進)하야 취(取)하매 하강(何强)을 좌(挫)치 못하랴, 퇴(退)하야 작(作)하매 하지(何志)를 전(展)치 못하랴.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12] 이래 시시종종(時時種種)의 금석맹약(金石盟約)을 식(食)하얏다 하야 일본의 무신(無信)을 죄(罪)하려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아(我) 조종세업(祖宗世業)을 식민지시하고, 아(我) 문화 민족을 토매인우(土昧人遇)하야, 한낱 정복자의 쾌(快)를 탐할 뿐이오, 아(我)의 구원(久遠)한 사회 기초와 탁락(卓犖)한 민족 심리를 무시한다 하야 일본의 소의함을 책하려 아니하노라.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오인(吾人)은 타(他)의 원우(怨尤)를 가(暇)치 못하노라. 현재를 주무하기에 급한 오인(吾人)은 숙석(宿昔)의 징변을 가(暇)치 못하노라. 금일 오인(吾人)의 소임은 다만 자기의 건설이 유(有)할 뿐이오 결코 타(他)의 파괴에 재(在)치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가의 신운명을 개척함이오 결코 구원(舊怨)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타(他)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 구사상, 구세력에 기미(覉縻)된 일본 위정가의 공명적 희생이 된 부자연 우(又) 불합리한 착오 상태를 개선광정(改善匡正)하야, 자연 우 합리한 정경대원(政經大原)으로 귀환케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서 출(出)치 아니한 양국 병합의 결과가 필경 고식적(姑息的) 위압과 차별적 불평(不平)과 통계 숫자상 허식의 하에서 이해 상반한 양 민족간에 영원히 화동할 수 없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去益深造)하는 금래 실적을 관(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본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피차간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임을 명지(明知)할 것 아닌가. 또, 이천만 함분축원(含憤蓄怨)의 민(民)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소이(所以)가 아닐 뿐 아니라, 차로 인하야 동양 안위의 주축인 사억만 지나인의 일본에 대한 위구(危懼)와 시의(猜疑)를 갈수록 농후케 하야 그 결과로 동양 전국이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비운을 초치할 것이 명(明)하니, 금일 오인(吾人)의 조선 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영을 수(遂)케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사로(邪路)로서 출(出)하야 동양 지지자(支持者)인 중책을 전(全)케 하는 것이며, 지나로 하여금 몽매(夢寐)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 공포로서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 문제이리오.
아아, 신천지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來)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장양(鍊磨長養)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始)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래(來)하야 만물의 회소(回蘇)를 최촉(催促)하는도다. 동빙한설(凍氷寒雪)에 호흡을 폐칩(閉蟄)한 것이 피일시(彼一時)의 세(勢)이라 하면 화풍난양(和風暖陽)에 기맥(氣脈)을 진서(振舒함은 차일시(此一時)의 세(勢)이니, 천지의 부운에 제(際)하고 세계의 변조를 승(乘)한 오인(吾人)은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아무 기탄(忌憚)할 것 없도다. 아(我)의 고유한 자유권을 호전(護全)하야 생왕(生旺)의 낙(樂)을 포향(飽享)할 것이며, 아(我)의 자족한 독창력을 발휘하야 춘만한 대계(大界)에 민족적 정화(精華)를 결뉴(結紐)할 지로다.
오등(吾等)이 자(玆)에 분기(奮起)하도다. 양심이 아(我)와 동존하며 진리가 아와 병진하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古巢)로서 활발히 기래(起來)하야 만휘군상(萬彙羣象)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어도다. 천백세 조령(祖靈)이 오등(吾等)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 기운이 오등을 외호하나니 착수가 곧 성공이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으로 맥진(驀進)할 따름인뎌.
〈공약 삼장〉
一. 금일 오인(吾人) 의 차거(此擧)는 정의、인도、생존、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一.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吾人)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던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최초 3.1독립운동기념비 연혁
최초 건립되었던 3.1독립운동기념비는 진해시 두동 산 263-3번지에 위치하였으며, 이 고장 지역의 3,000여 애국지사가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고자 애국지사의 후손과 이 고장 출신 인사들의 성금으로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1986년 6월 1일 착공하여 1986년 8월 15일 준공(높이=12m)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여건의 변화와 노후로 새롭게 이 자리에 3.1독립운동기념비를 건립함에 따라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여기에 당시 성금기탁자의 명단을 새겨 그 고마운 뜻을 기리고자 합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양동(웅동) 산4-2 웅동공원 내 3.1독립운동기념비를 찾았다.
웅동 3.1독립운동 기념비
웅동 3.1독립운동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