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훈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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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하천리 33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창원시 의창구 북면 하천리 대촌마을 선산에 있다는 애국지사 김진훈의 묘를 찾아왔다.
공적개요
김진훈(金鎭焄) 선생 (1924.8.9-1945.6.23)
경남 창원(昌原)사람이다.
동래중학교 재학 중 1940년에 양중모(梁仲模), 남기명(南基明), 김일규(金一圭)등과 함께 은사 허현(許鉉)의 지도를 받아 독서회를 조직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41년 겨울에는 회원 김일규의 집에서 회원들과 모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독서회를 강화하여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으로 개편하였다.
1942년 봄에 이들은 남기명의 집에서 차 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 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행동반으로서 외교 관계의 일을 맡았다.
그는 당원들은 여러차례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방략을 협의하다가,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 행동을 개시하였으며, 당원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로 취하도록 하였다.
1944년 8월 1일에 양중모의 집에 다시 모여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 분석하고 군사기밀 탐지, 일군탄약고 폭파, 군용열차 통과시 구포(龜浦) 다리 폭파 등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지일회(紫一會), 순국당(殉國黨) 등과도 연락을 통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려 했다.
특히 순국당은 1944년 5월 결성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李觀洙)가 그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1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탐지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그 당원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피체 후 미결수로 부산형무소에서 보고를 치르던 중 일격의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45년 5월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GPS 상의 주소는 창원시 의창구 북면 하천리 337 대촌마을 하천교회 뒤편이다.
故 解放鬪士 金鎭焄 之墓(고 해방투사 김진훈 지묘)
단기 4278년 5월 14일 동무 일동
愛國志士 金鎭焄 之墓(애국지사 김진훈 지묘)
서기 1924년 8월 9일 생
서기 1945년 6월 23일 졸
제 진부 진민
질 석홍 형수 인수 윤수 성수
愛國志士 金鎭焄 之墓(애국지사 김진훈 지묘)
여기 잠드신 분은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스물 둘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독립유공자 김진훈 지사이시다. 지사는 서기 1924년 8월 9일 김녕김공 인규씨의 차남으로 의창군 북면 하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창원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동래고보에 입학하여 독서회를 조직하고 민족자립정신을 배양하여 마침내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졸업한 뒤 동지들과 비밀리에 조선독립청년당을 결사하고 동래 장산에서 조국독립을 위하여 신명을 바치기로 하늘에 맹세하였다. 지사는 일본의 중요한 군사시설을 폭파하기로 결의하고 동경의 청산학원에 입학하여 군사시설을 탐지하고 국내와 연락하여 거사할 기회를 엿보던 중 1944년 8월에 부산의 동지들이 피검되자 지사도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일본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중병을 얻어 사경에 이르자 보석되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고대하던 조국광복을 두달 앞둔 1945년 6월 23일 순국하였다. 지사의 공적이 알려지자 국가로부터 1982년 8월 15일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아 장하도다 대한의 남아로 이 땅에 태어나서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투쟁하다가 목숨을 바쳤으니 그 대의와 애국충절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이에 지사를 추모하는 후배들이 지사의 애국정신을 비석에 새겨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문학박사 손팔주 근찬
영산후인 신용옥 근서
1985년 11월 24일
애국지사 묘역정화 의창군추진위원회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