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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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외동 523-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나는 열절을 영세에 전하는 길이 되리로다. 남에 만갑 천갑 원갑 녀서에 경기 현금 흥복이요 만갑의 자에는 영호 영? 영철 영식 천갑의 자에는 종규 병구 병화 창갑의 자에 헌충 열주 영우 철우 성우등 자손이 번창함은 선생의 은덕의 소치이다. 이제야 자흥손들이 선생의 위국충절의 일단을 편석에 새김은 만시지탄이나 위선의 도리라하리로다. 선생의 백절불굴의 지조 만인공앙의 유덕은 길이 청사에 빛날진저
GPS상의 주소는 경남 창원시 성산구 외동 523-1이다.
애국지사 배중세의 묘

1920년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려고 하다가 붙잡힘.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출옥 후 경북의열단에 가담하여 활동 중 세칭 양전호사건에 연루 피체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1년 1927년 12월 출옥 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1월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1944년 1월 23일 옥중 순국하였음.
2008년 7월 21일 창원시장
단정 배중세선생과 동생이신 배정세선생의 묘가 나란히 있다.
애국지사 단정 분성배공 중세지묘
항일지사 단정 배중세선생 지비
낙낙한 장송은 백설도 그 푸름을 꺽지못하고 꿋꿋한 지사는 난세에도 그 지조를 굽히지 않나니 자연은 상록의 거묵으로 인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인류역사는 지사 의인으로 말미암아 바른 길로 나아감이라 저 포악한 왜제가 우리국토를 유린했을때 목숨을 던져 그에 항거한 선열들이 없었던들 어찌 조국이 광복되었으리요 민족의 생존마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을때 목숨을 홍모같이 여기고 감연히 일어나 구국의 선봉에 나선분이 이 고장에 계셨으니 항일지사 배중세선생이 그 분이시다. 선생의 호는 단정 본관은 분성으로 신라6부장의 한분인 기타공이 그 시조이시고 중조이신 고려건국공신 현경공의 후예이며 아버님 기
홍 어머님 반남박씨의 장남으로 상남 토월리에 태여나시어 유시로부터 학문과 덕행으로 인근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니 깊이 연유한 바있다하리로다. 14세에 진사 김달근의 따님 김해김씨와 작배하여 화락한 가정을 이루었으나 1919년 3.1운동에 24세의 젊음으로 횽약투신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성 파호문외에서 동지 황상규 김원봉 곽재기 유치형 신철휴 이종암 이성우 윤소룡 서상락 김윤희 이락준 강세우등과 혈맹으로 의열단을 조직하고 폭탄과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여 일본요인의 암살과 주요건물의 파괴를 꾀하니 왜인들의 간담을 서늘케한 이른바 밀양폭탄사건이다. 왜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숭고한 그 지조 추호도 변함이 없었고 출혹하자 곧 맹우들과 지하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해외투사 이종암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한일로 다시 1년간의 옥고를 겪으면서 불치의 병을 얻었으니 참으로 통탄을 금치 못할일이로다. 와병중에도 국권회복의 일념 골수에 사무쳤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동지를 모아 암암리에 조국재건을 준비하다가 또 다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니 쇠약한 병구에 어찌 옥고를 견딜수잇었으랴. 잔인한 왜경도 포항도립병원으로 이감하였으나 한달이 채 못되어 1944년 1월 23일 한많은 일생을 마쳤으니 민족해방을 눈앞에 두고 어찌 차마 영원히 눈을 감으셨을까? 위훈에 보답하는 건국공포장이 정부서 추서되고 영윤 만갑이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광복회 부산지회장으로서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들을 보살피고 있음은 거룩한 영령을 위로하는 보은이요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