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 1033-1
- 탐방로그
- 서암 조계승선생 창의비 공적안내판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의 서암정 바깥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 1035-1
서암정 내에 있는 서암 조선생 창의비에 대한 안내판이 건립되었다.
애국지사 서암 조선생 창의비
애국지사 서암 조선생 창의비
애국지사 서암 조선생 창의비
관리번호 : 42-1-27 / 관리자 : 항일독립운동가 서암 선생 추모사업회 / 소재지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 1033-1(미천부락)
조계승(1880.10.14.)선생의 호는 서암이며, 함안군 여항면 평암리에서 태어나셨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고 우리 민족의 해방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세운동은 조한휘, 한종순, 이찬영, 조병흠, 박건영, 강기수, 한관렬 선생 등이 계획하고 대산면의 한문 교사 안지호와 연락하여 거사일을 정하고 태극지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오후 2시,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5시 마산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 포병대대와 현지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 때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1987년 애국지사 서암 조선생 창의비를 세우고, 2004년 12월 10일 국가보훈처에서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관리번호 : 42-1-27 / 관리자 : 항일독립운동가 서암 선생 추모사업회 / 소재지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 1033-1(미천부락)
조계승(1880.10.14.)선생의 호는 서암이며, 함안군 여항면 평암리에서 태어나셨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고 우리 민족의 해방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세운동은 조한휘, 한종순, 이찬영, 조병흠, 박건영, 강기수, 한관렬 선생 등이 계획하고 대산면의 한문 교사 안지호와 연락하여 거사일을 정하고 태극지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오후 2시,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5시 마산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 포병대대와 현지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 때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1987년 애국지사 서암 조선생 창의비를 세우고, 2004년 12월 10일 국가보훈처에서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待淸門(대청문)
棲巖亭(서암정)
서암 조계승 선생의 창의비와 그 아드님이신 낙산 조병대 선생의 기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愛國志士 棲巖 曺先生 彰義碑(애국지사 서암 조선생 창의비)
태양은 자연의 광명이요 지조는 인간의 등불이니 만물은 태양의 빛과 열로 생명이 유지되고 인류역사는 지사 의인으로 인해 바른길로 나아감이라. 저 포악한 왜제가 우리 국토를 강점했을때 지조를 굽히지 않은 선열들이 아니 계셨던들 어찌 조국이 광복되었으리요. 평생을 민족의 자주와 나라의 독립에 바친 지사가 이 고장에 계셨으니 조계승 선생이 그 분이시다. 선생의 자는 익중 호는 서암이요 본관은 창녕으로 신라 태사공 휘 계룡이 시조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적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많은 유학 저술을 남기신 문간공 휘 호익이 현조이시다. 아버님은 휘 석로요 어머님은 김해김씨 인식의 따님으로 1880년 11월 29일 의창군 진북면 금산의 본제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향리의 칭찬이 자자하였고 천성이 지고하여 6세 때 어머님의 병석에서
주야로 시탕을 받들다가 상을 당해서는 지극한 슬픔 속에서 예절틀 준수하였으며 새어머님 전주이씨를 지성으로 섬겼다. 11세 때 이 마을 평암에 이거한 후 아버님이 세운 정심재에서 학업에 열중하여 불과 13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896년 유인석 허위의 의병군문으로 달려가 함게 왜적과 싸우려 했으나 친환으로 참여하지못하였고 1900년부터 연재 송병선의 문하에서 수학중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금치 못하여 비장한 상소를 올렸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호곡을 계속하다가 침략군의 우두머리 장곡천에게 강력한 항의서를 전달하니 이후로 왜경의 감시를 받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일어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질즈음 선생은 장남인 병대와 제자인 남병희 김상집 박노일 홍종근 조위제 등을 인솔하고 3월 19일 함안읍 독립만세 시위의 선두에 나섰고 이날 오후 마산에서 급파된 왜헌병대에 체포되여 혹독한 고문 끝에 3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 무한한 미회도 만치마는 오직 광복 절천시 48수를 지어 재소자들의 가슴에 항일정신을 불을 질렀고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에는 아사동맹회를 조직하기도 하다가 1943년 3월 26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못 보신 채 향년 64세로 서거하였다. 배위는 의령남씨 석원의 따님으로 7남 1녀를 두었으니 남에 병대 병화 병숙 병도 병곤 병길 병국 여서는 진양 정대교이며 손이 35인이다. 1968년 3월 1일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수 년 전에 인근 열군에 기념사업회에서 유서 깊은 이 서암정에 선생의 창의비를 건립하기 위해 홍한순 회장과 조성래 총무가 서암도
고집을 가지고 와서 불녕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평소에 선생의 학덕과 지조를 앙모하든 터이라 비문 박덕을 무릅쓰고 이렇게 적는다
서기어린 여항산 남녁 기슭에 거룩한 애국지사 고허가 있어 백척불굴 그 지조 돌에 새기니 겨레 역사 더불어 영원하리라.
서기 1987년 삼일절 인천 이태길 삼가 짓고 익성 배문준 삼가 씀
애국지사 서암 선생 기념사업회 세움
서기어린 여항산 남녁 기슭에 거룩한 애국지사 고허가 있어 백척불굴 그 지조 돌에 새기니 겨레 역사 더불어 영원하리라.
서기 1987년 삼일절 인천 이태길 삼가 짓고 익성 배문준 삼가 씀
애국지사 서암 선생 기념사업회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