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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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임곡리 산1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열사 이교재의 무덤
열사 성주 이씨 이름은 교재니 창원군 대실 사람이다. 기미 후 광복운동을 계속하다가 적의 부산법원에 끌려 차 년 반의 체형을 치르고 계유 이월 일에 구끼다 이제 그 사행의 줄거리를 추리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으로서의 활약은 곧 삶을 잃게 한 사건이지만 이에 앞서 독립선전문 인쇄 산포로 대구서 일년 징역 상해 가던 도중 봉천서 석달 구류 고학생 갈돕회 소인극 단장으로 지방서 때때의 검속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난 해 정해까지 통산하여 겨우 나이 사십 칠 세 그 구낌이 얼마나 통석한가. 그러나 선배의 피와 정신을 미천으로 거두어진 오늘의 승리는 열사에게 보다 크고 보다 긴 수명을 부여했나니. 국권이 확립됨에 따라 가족인 인격교양에 힘쓴 어머니 김씨 농토를 주려 자금에 보탠 아버지 봉화 임시정부 지령서 기타 문서를 살깊이 감추어 실적을 살려온 아내 홍씨의 성가가 드러나고 전 주석 김구와 딸 태순 봉사손 정순을 어루만져 주던 일이며 유지 및 학생들이 손 뫃아 숩실산 새 무덤과 비를 이룩한 것이다. 징거의 토막 토막이라 어찌 한가지 우연함이 있으리오. 열사 젊어서 한문학을 닦아 달 아래 시경 읊는 소리 삼린에 울려짐은 범물 아니더란 말로 유명하거니와 절개를 상징한 죽헌 시호도 그때부터 많이 불리어지다.

상해가 세 번이라면 감옥은 네 번이라오
기 꺾길 줄이 있으랴만 몸은 그만 마쳤구나
아 임이로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단기 사천 이백 팔십 칠년 구월 일
이일해 지음 서정현 씀
기념사업기성회 세움
大韓民國 上海臨時政府 慶尙南道 常駐代表 烈士 竹軒 李敎載 殉國紀蹟碑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경상남도 상주대표 열사 죽헌 이교재 순국기적비)
열사 죽헌 이교재 순국기적비명 병서
열사의 관은 성주요 아호는 죽헌이라. 1887년 8월 9일 경남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에서 출생하셨다. 열사는 남달리 의협심이 장했으며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품성이었다. 창창한 24세에 경술국치를 당한 열사는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열사가 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 험난한 도정이었다. 1919ㅕ년 전전면 오서리 본가를 거점으로 향리의 동지들과 같이 독립선언서와 격문등을 작성하여 도내 일원에 비밀리에 배포하며 지하운동을 펴나갔다 그 결과 경남북일 원에서 수 많은 동지들을 규합할 수 있었으며 이 동지들이 뒷날 기미 3.1운동에 각 지방의 선도자가 되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열사는 진주경찰서에 검거되고 재판에 회부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1921년 출옥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과 국내 연락책의 밀명을 받아 국내에 잠입하여 지하활동을 계속하던 중 통영군 김종원가에서 행한 모금 사실이 탄로되어 1923년 9월 21일 통영경
찰서에 피체되고 마산형무소에서 두번째로 2년의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 옥고를 풀 틈도 없이 상해로 다시 들어가려다가 이번에는 신의주 국경에서 피체되어 세번째로 서대문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뤘다. 그러나 일제의 혹독한 강압도 열사의 투지를 꺽지 못하였으니 다시금 임정의 밀명을 띄고 국내로 돌아온 열사는 고학생들을 포섭하여 갈듭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이들로 하여금 전국을 돌며 정보교환과 애국사상 앙양고취에 주력하였다. 이들의 활동상황은 수시로 상해임시정부에 보고되었으며 열사는 이 갈돕회를 끝까지 배후에서 지휘하였다. 1931년 11월 20일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장 조완구와 재무장 김구의 지령으로 열사는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되어다. 거기에는 다음 세가지 비밀지령이 내려졌으니 첫째로 애국지사간의 연락이요 둘째는 광복운동에 필요한 지방의 비밀조직 결성이며 끝으로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보내는 임무였다. 이러한 중책을 띄고 진주의 허만 정달성의 문대효 창녕의 성락문 등을 찾아 임정의 활동자금 헌납을 종용하는 등 맡은 바 임무수행을 위해 주야를 불원하고 동분서주하였다. 그야말로 조국광복의 그날을 기약하며 고달픈 풍찬노숙을 거듭하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일경의 집요한 감시는 열사의 활동을 탐지하게되어 다시 마신경찰서에 피체되었으며 부산형무소에서 손발톱을 뽑히는 고행속에 6년형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열사의 끊임없는 조국 광복활동은 극렬 항일투사로 몰려 일제 관헌의 잔인한 가학과 형언조차 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의 표적이 되었으나 구국일념에 불타는 잔인한 의지는 결코 꺽이지 않았다. 수형중 고문의 여독으로 끝내 순국하니 때는 바로 1933년 음력 1월 20일이며 향년 47세였다. 오호와 천인공로할 일제의 만행은 형기가 끝나지 않았다하여 열사의 묘소마저 철조망으로 얽었으니 이 어찌 통분을 금할 수 있으리요. 꿈많은 젊은 나이에 일찍이 구국운동대열에 몸을 던져 온갖 고난과 영욕을 무릅쓰고 열화같은 우국애정으로 한몸을 구국의 화신으로 불사른 송죽같이 고절한 일생이었다. 비록 육신은 비참하게 꺾여져 땅속에 묻혔으나 거룩한 열사의 얼은 겨레의 가슴속에 불명의 등불이 되어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의 날으리 맞이하게되었다. 임정정부 김구 주석은 1946년 9월 17일 창원군 진전면 산골의 초라한 옛동지의 묘소를 참배하고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유족을 위로하였다. 1954년 마산일보(현 경남신문) 김형윤 사장은 열사의 애국충절을 기리고자 추모회를 조직하여 지역유지의 협찬과
각급학교 학생들의 성금으로 현 위치에 묘소를 옮기고 묘비를 세웠다. 1963년 3월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구국의 제단에 바친 열사의 거룩한 넋을 위로하였다. 임곡리에 옮겨진 묘비에 직위가 누기되어 금반 당국의 배려로 개수하게 되었다. 특히 열사의 부인 홍여사는 불굴인고하고 열사에게 내려진 임명장을 잘 간수하여 오늘의 유일한 증거가 되게 하니 그 정성 어찌 흠상하지 아니할소냐. 찬자 자굴을 무릅쓰고 열사의 애국충정에 감명하여 오석에 각명하니 서기 어린 여항산 남쪽 기슭에 거룩한 열사의 고거가 있어 백절불굴의 그 애국혼은 겨레와 더불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
서기 2002년 3월 20일 진전 팔각회 초대회장 이주현 근찬
마산향교 전교 홍인석 감수
함안군담수 회장 조영제 근서
진전팔각회 근수
애국지사 이교재 선생의 묘의 GPS상의 주소는 진전면 임곡리 산12-1번지였다.

애국지사 이교재 선생의 묘(1887.7.9 ~ 1993.2.14)
경남 창원(昌原) 사람으로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남북 일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 가담, 군자금모집 사명을 띠고 다시 입국하여 활동하다 진주에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던 보고서의 발각으로 3번째 수감되어 부산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 소재지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임곡리 산
2010년 7월 1일 昌原市長(창원시장)
이교재 선생 묘소 입구 표지석과 기적비 안내판이 보인다.
열사 이교재 선생 순국 기적비

이교재 선생은 경남지역의 대표적인 항일 순국선열 중 한분으로,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남북 일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선생은 임시정부 경상도 상주대표로 지내며 군자금 모집 사명을 띠고 다시 입국하여 활동하다 진주(晋州)에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던 보고서가 발각되어 3번째 수감되었으며, 부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 순국한 것을 후대에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함.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烈士 竹軒 李敎載 先生 墓所 入口(열사 죽헌 이교재 선생 묘소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