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산면 방곡리 629-30
- 탐방로그
- 춘천시 남산면 방곡리 629-30 춘천시립남산도서관 주차장에 이소응의 공적비와 기념비가 있다. 또한 이소응 선생이 남긴 문장 및 한시가 새겨진 조형물이 함께 세워져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世禍到極以詩哭 / 세화도극이시곡
西來消息日增非 / 서래소식일증비
天地恢恢少所歸 / 천지회회소소귀
惡獸快心歌發達 / 악수쾌심가발달
吾人含痛哭危微 / 오인함통곡위미
且希往哲依中德 / 차희왕철의중덕
儲見高皇起布衣 / 저견고황기포의
自古有生皆有死 / 자고유생개유사
死於義大大生輝 / 사어의대대생휘
西來消息日增非 / 서래소식일증비
天地恢恢少所歸 / 천지회회소소귀
惡獸快心歌發達 / 악수쾌심가발달
吾人含痛哭危微 / 오인함통곡위미
且希往哲依中德 / 차희왕철의중덕
儲見高皇起布衣 / 저견고황기포의
自古有生皆有死 / 자고유생개유사
死於義大大生輝 / 사어의대대생휘
나라의 위태로움을 슬퍼하노라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날로 나라가 잘못되어 간다하니.
천지는 한없이 넒건만 내 몸 하나 돌아갈 곳 없구나.
짐승만도 못한 일본은 조선을 위한다고 노래하지만,
우리는 원통함을 삼키며 힘없고 위대한 나라를 슬퍼하네.
옛 철인은 치우침 없는 덕에 의지하려 애썼으며,
나라 세운 임금들은 어려운 처지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태어나면 모두 죽게 되나니.
대의를 위해 죽어야 위대하게 빛나리라.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날로 나라가 잘못되어 간다하니.
천지는 한없이 넒건만 내 몸 하나 돌아갈 곳 없구나.
짐승만도 못한 일본은 조선을 위한다고 노래하지만,
우리는 원통함을 삼키며 힘없고 위대한 나라를 슬퍼하네.
옛 철인은 치우침 없는 덕에 의지하려 애썼으며,
나라 세운 임금들은 어려운 처지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태어나면 모두 죽게 되나니.
대의를 위해 죽어야 위대하게 빛나리라.
習齋 李昭應 先生(습재 이소응 선생) 약전
습재 이소응(자는 敬器 경기, 호는 習齋 습재 또는 思靖居士 사정거사, 다른 이름은 直愼 직신 또는 宜愼 의신) 선생은 1852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에서 태어나 1930년 이역만리 중국의 외몽고 지역 민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외세의 침입에 항거한 춘천의병장이었고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춘추의 의리 정신을 실천한 유학자였다.
선생은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 되어가는 1896년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춘천의병장이 되어 친일 관찰사를 처단하여 호국의 결의를 전국에 펼쳐 의병 투쟁을 실천하였으며, 의암 류인석 선생과 함께 두 번이나 요동지역으로 건너가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쉼 없이 전개 하였다. 선생은 화서 이항로의 제자였던 성재 류중교와 의암 류인석의 학문을 계승하며 '옳은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물리친다.'는 춘추의 의리정신을 실천하고 그 학문세계를 응축하여 56권의 문집으로 남긴 대유학자이다.
조국이 일제에 병단된지 100년이 되며 선생의 서거 80주년이 되기에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과 학문의 세계를 알리어 춘천이 충절과 학문에 있어서도 명실상부한 고장임을 자손만대에 널리 알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2010. 12. .
춘천문화원장 이대근
습재 이소응(자는 敬器 경기, 호는 習齋 습재 또는 思靖居士 사정거사, 다른 이름은 直愼 직신 또는 宜愼 의신) 선생은 1852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에서 태어나 1930년 이역만리 중국의 외몽고 지역 민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외세의 침입에 항거한 춘천의병장이었고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춘추의 의리 정신을 실천한 유학자였다.
선생은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 되어가는 1896년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춘천의병장이 되어 친일 관찰사를 처단하여 호국의 결의를 전국에 펼쳐 의병 투쟁을 실천하였으며, 의암 류인석 선생과 함께 두 번이나 요동지역으로 건너가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쉼 없이 전개 하였다. 선생은 화서 이항로의 제자였던 성재 류중교와 의암 류인석의 학문을 계승하며 '옳은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물리친다.'는 춘추의 의리정신을 실천하고 그 학문세계를 응축하여 56권의 문집으로 남긴 대유학자이다.
조국이 일제에 병단된지 100년이 되며 선생의 서거 80주년이 되기에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과 학문의 세계를 알리어 춘천이 충절과 학문에 있어서도 명실상부한 고장임을 자손만대에 널리 알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2010. 12. .
춘천문화원장 이대근
습재 이소응 선생
1852~1930
- 설계 : 김수학(조각가)
- 한시 원문 : 습재집 집자
- 선시·번역 : 유연익(광복회 강원도지부장) 이구용(강원대 명예교수) 원영환(의암학회회장) 박종숙(수필가)
- 글자 도안 : 박경자(서예가)
- 조경 : 정병모(춘천문화원이사)
- 시공 : 물이석재
1852~1930
- 설계 : 김수학(조각가)
- 한시 원문 : 습재집 집자
- 선시·번역 : 유연익(광복회 강원도지부장) 이구용(강원대 명예교수) 원영환(의암학회회장) 박종숙(수필가)
- 글자 도안 : 박경자(서예가)
- 조경 : 정병모(춘천문화원이사)
- 시공 : 물이석재
이소응 공적비와 기념비는 강원 춘천시 남산면 방곡리 629-30 춘천시립남산도서관 주차장에 있다.
사진 상 왼쪽에 놓인 것이 공적비, 오른쪽에 세 개의 비석으로 이루어진 것이 기념비이다.
춘천의병대장 습재 이소응 선생 공적비
· 관리번호 : 16-1-7
· 관리자 : 남산도서관
· 소재지 : 춘천시 남산면 방곡리 629-30 (남산도서관내)
· 건립자 : 강원애국선열추모사업회
이소응 선생은 1852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주, 호는 습재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추앙을 받았다. 조선침략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제가 1895년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제의 만행과 내정간섭을 규탄하여 전국의 유생들이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1월 20일 류중락 • 이만응을 중심으로 한 의병 천여 명이 춘천부에 운집하여 습재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습재 선생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함께 의거하여 무도한 적들을 토벌할 것을 호소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초기에는 춘천부사 겸 선유사로 처음 부임하는 친일관료 조인승을 처형하는 등 크게 기세를 떨쳤으나, 무기가 부족한 데다 조직과 훈련이 허술하였던 의병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관군에 패배하였다. 습재선생은 부득이 제천의 류인석 의진으로 들어가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고, 류인석 의진이 패퇴하여 서간도로 망명할 때 동행하였다. 이후 40여 년간 구국항쟁을 하다가 민족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30년 3월 25일 이역만리 타국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소응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며 널리 선양하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나아가서 애국애족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2002년 1월 10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 관리번호 : 16-1-7
· 관리자 : 남산도서관
· 소재지 : 춘천시 남산면 방곡리 629-30 (남산도서관내)
· 건립자 : 강원애국선열추모사업회
이소응 선생은 1852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주, 호는 습재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추앙을 받았다. 조선침략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제가 1895년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제의 만행과 내정간섭을 규탄하여 전국의 유생들이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1월 20일 류중락 • 이만응을 중심으로 한 의병 천여 명이 춘천부에 운집하여 습재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습재 선생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함께 의거하여 무도한 적들을 토벌할 것을 호소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초기에는 춘천부사 겸 선유사로 처음 부임하는 친일관료 조인승을 처형하는 등 크게 기세를 떨쳤으나, 무기가 부족한 데다 조직과 훈련이 허술하였던 의병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관군에 패배하였다. 습재선생은 부득이 제천의 류인석 의진으로 들어가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고, 류인석 의진이 패퇴하여 서간도로 망명할 때 동행하였다. 이후 40여 년간 구국항쟁을 하다가 민족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30년 3월 25일 이역만리 타국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소응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며 널리 선양하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나아가서 애국애족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2002년 1월 10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春川義兵大將 習齋 李昭應 先生 功績碑(춘천의병대장 습재 이소응 선생 공적비)
선생의 휘는 소응 아명 중만 이명 직신 직신 자는 경기 호는 습재 사정거사 본관은 전주이다. 1852년 8월 7일 춘천 남산면 방곡리에서 조선 선조조 대왕 제 9왕자 경창군 주의 9대손으로 부친 이도재와 모친 고령신씨(만구지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품성이 고매한 선생은 화서 이항로의 고제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에게 수학하여 평생토록 존화양이에 근거한 위정척사사상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이에 1876년 1월 개항에 반대하여 척사 유생들과 함께 척양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생은 1889년 8월 성재가 제천 장담리로 강학 장소를 옮겨 갈 적에 배종하여 스승이 타계(1893년)하기까지 유학에 전념하였다. 일제와 친일 내각이 자행한 1894년의 갑오 왜란 갑오 개혁과 1895년 을미사변 단발령 반포 등을 계기로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선생은 유중악 유봉석과 기의를 의정하고 홍시영 이면수와 이수춘 민영문 유홍석 유중락 등이 통문을 돌리고 민심을 격동시키며 이만응 이경응 정인회 박현성 성익현 등이 사민 1천여 명을 규합 봉기하여 관아를 습격 점령하고 전임 유수 민두호의 생사당을 파괴하는 등 춘천 유림의
주도하에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때(1월 20일) 유생들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오른 선생은 당시 삭발하고 부임하는 춘천 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서면 탑동(안보리)에서 잡아들여 처형하는 등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먼저 의세를 떨치고 전국에 격문(격고팔도)을 보내 기의를 촉구하는 동시에 무과 출신 종조 이면수를 군사장으로 삼는 등 3천여 명으로 늘어난 춘천의진을 새롭게 편성하여 가평의병과 함께 서울 진격에 나겄다. 마침내 2월 3일 가평의 벌업산(보납산)에서 급파된 관군(친위대 중대장 신우균 김구현)과 격전을 벌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패산하여 춘천 약사현(죽림동) 뒷산으로 퇴진하자 선생은 종형인 이진응에게 의진을 맡기고 지평현 감역인 맹영재에게 원병(포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잡힌 바 되어 의암 유인석이 보낸 정익과 이찬익의 도움으로 2월 17일 제천의진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런 전황에서 의병대장을 맡은 직헌 이진응은 추격해 온 관군과 약사현에서 공방전을 벌인 끝에 2월 8일 전사하였으며 이어서 의병대장이 된 종제 이경응은 서울 진격을 꽤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자 5월 초 잔여 의병 2백여 명을 이끌고 한때 강릉의진과 제천의진에 합세하였다. 한편 제천의진으로 합류하여 군중사무대강을 짓고 참모(군무도유사)로서 역할을 감동한 선생은 원주 근처 배양산 기슭에서 은거하다. 1898년 요동 통화현 오도구로 가서 척화의거사실대략을 서술하는 등 망국 3년 여 만에 귀국하였다. 기후 1903년에 제천으로 이주하여 친일적인 일진회에 대항한 선생은 군내에서 향약을 설행한 탓으로 곤욕을 치렀으며 1909년 청풍으로 옮겨 은신하였으나 국치 후 일경에게 체포 구치되어 온갖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갑오개혁 이래 신제에 따르지 않고 호적에도 입적치 않을만큼 배일 의식이 철저했던 선생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1911년 5월 유홍석 유인석 등 사우 종족과 더불어 요동 회인현 대황구로 망명하여 20년간 관전현 등지로 전전하면서 의암을 비롯한 지사들과 본토 수복의 방략을 모색하시다가 1930년 4월 23일(음 3월 25일) 몽고 사한지대인 경인현 제오구 민가 둔와사에서 향년 79세로 서거하니 선생의 시신은 그곳에 권조한 후 1943년 제천 봉양면 공전리로 반장되었고 1946년 제천 자양영당에 배향되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선생의 학문 각 사상을 담은 유고는 후학들에 의하여 1969년에 습재집으로 간행되었다. 이제 조국 광복의 성전에 위국사신하신 선생의 피 맺힌 위훈을 깊이 각명함은 실로 오늘을 경계하고 내일의 귀감으로 삼고자 함이다.
서기 2001년(단기 4334년) 중하 강원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이구용 근찬
서기 2001년(단기 4334년) 중하 강원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이구용 근찬
주관 강원애국선열추모사업회
건립추진 남산면민 일동
고문 국회의원 외교통상부장관 한승수, 강원도지사 김진신, 춘천시장 배주섭, 강원도의회의장 허천, 춘천시문화원장 이대근, 한나라당 춘천시지구당위원장 유중수, 광복회 강원도지부 지부장 유연익
건립추진 남산면민 일동
고문 국회의원 외교통상부장관 한승수, 강원도지사 김진신, 춘천시장 배주섭, 강원도의회의장 허천, 춘천시문화원장 이대근, 한나라당 춘천시지구당위원장 유중수, 광복회 강원도지부 지부장 유연익
세 개의 비로 이루어진 이소응 기념비이다. 기념비에는 이소응의 약전과 그가 쓴 문장 및 한시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