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용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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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1039
탐방로그
권태용 선생 기념비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1039 진전중학교로 들어가는 방향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어 이르되
나라 위한 대의 앞에 처노가 있으리오. 경술 치욕 씻고자 이역설원 몇 해던고 하늘도 무심할사 광복 전에 먼저 가시니 송백도 시들
었네. 겨레의 통곡 일레 조국광복 이룩되어 만방에 빛나거니 공은 명목하소서. 구천복을 누리소서.
초계 변지섭 근찬병서
서기 1988년 술진 11월 일 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1031 산자락 지사 송원 권태용(權泰容) 선생 기념비를 찾았다.
자료에는 정확한 주소는 없고 안동권씨 재실 경행재에서 약 1km라고 한다.
하지만 찾아가는 길에 있는 비석들은 모두 밀성박씨 선조들의 비석이었다.
권태용 기념비는 진전중학교로 들어가는 방향에 위치해 있다.
GPS상의 주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1039 이다.
志士 松園 權泰容 先生 紀蹟碑(지사 송원 권태용 선생 기적비)
志士 松園 權泰容 先生 紀蹟碑(지사 송원 권태용 선생 기적비)

권태용 선생의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정보는 다음과 같다.
1919. 3월 慶南 昌原郡 鎭東과 古縣面에서 주민 다수를 규합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 출처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의 휘는 태용이요 자는 서원이며 호는 송원이니 안동권씨다. 시조 휘 행은 금성 신라 왕예나 고려태조왕건을 도와 병산에서 후백제 견훤을 대파한 공으로 사성하여 권이라 하고 삼한 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태사를 제수하여 안동부를 식읍으로 하니 안동권씨가 비롯하였다. 공은 곧 33세손이 된다. 고는 휘 병의요 자봉중이며 비는 김해김씨 병립의 녀로 공은 1886년 고종 병술 10월 8일에 진전면 면오서에서 3형제 중의 차자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성장하면서 기국이 대범하였다. 부모를 섬겨 성정의 정성을 다하였으며 학문에 면려하되 깊이 생각하고 의문은 끝내 밝히는 인내가 있었다. 항상 나라 안의 정세가 날로 그릇됨을 통한하고 강개의 염을 금치 못하던 차에 1910년 경술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니 이미 삼천리 금수강산은 빼앗긴 땅이요 이천만 민족은 이민족의 노예였다. 공은 절치액완하며 원수 갚기를 맹세하니 때에 공의 나이가 25세였다. 1919년 기미에 마침내 때는 왔다. 3월 1일 서울에서 울려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3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3월 5일경 동지 변상태가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낭중에 감추어 귀향하자 공은 창원의
이수룡 권영대 권영조 변상섭 변상헌 함안의 조태식 이경형 고성의 황태익 등의 동지와 일당에 모여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것을 맹약하였다. 그로부터 공의 눈부신 활동은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작성하고 격문 전단을 목판으로 인출하였다. 3월 28일(음 2월 27일) 고현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는 광복을 보려는 흥분의 도가니요 태극기의 물바다였다. 이 시위에서 공과 권영대 변상헌 등은 피신하여 일헌병의 체포를 면하였는데 이는 후일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현의거 1주일 후인 4월 3일(음 3월 3일) 삼진에서 일어난 의거는 수원 선천 수안의 그것과 더불어 기미독립만세운동의 4대 의거로 손꼽힌다. 이에 관하여 당시의 공의 재판기록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피고 권태용은 한국을 독립시키려는 목적으로써 대중을 취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고 시위운동을 할 것을 기도하여 대정 8년 4월 2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근곡리 거주 황치순에 대하여 명3일 대중이 취합하여 양촌리 방면으로부터 진동 읍내를 향하여 행진할 것인즉 이에 참가하라고 선동하고 이어 율치리 김순삼 방에서 동면 근곡리 거주 김영종에게 대하여 명3일 독립운동을 할 것인즉 참가하라는 취지로 선동하고... 」 주문에서는 「징역 1년에 처함」이라고 하였다. 공은 두 차례의 의거 후 곧 만주로 탈출하였다가 미기에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서울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니 망명 생활은 비록 동지들과 상종하였다고는 하나 풍우에 굶주림과 헐벗음과 나라 잃은 백성에 대한 박해와 부모처자에 대한 향수와 고독이 공의 심신을 병들게 하고 있었으니 그 괴로움이야 어찌 수년의 형옥에 비하랴. 그 후 다시 적국 일본으로 밀입하였으나 미구에 고종하시니 1936년 병자 4월 26일이요 향년이 51 탑동 장재산 건좌에 영면하니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못 보고 돌아가셔서야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배는 밀성박씨 두효의 여로 휘 월선이며 1887년 정해에 출생하여 1926년 6월 12일에 졸하니 공과 쌍분이다. 슬하에 1남이니 영홍이요 진양강씨 만수의 여 순이를 취하였으며 그 남에 오준 오수요, 오준의 남에 경국 경도며 오수의 남에 경사다. 하루는 공의 당질 영해가 찾아와 묘명을 청하거늘 생각컨대 공과 나의 선고는 동지로 두 의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일제하의 질곡 속에 형극의 길을 걸은 분이라 흔쾌히 붓을 들
이수룡 권영대 권영조 변상섭 변상헌 함안의 조태식 이경형 고성의 황태익 등의 동지와 일당에 모여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것을 맹약하였다. 그로부터 공의 눈부신 활동은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작성하고 격문 전단을 목판으로 인출하였다. 3월 28일(음 2월 27일) 고현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는 광복을 보려는 흥분의 도가니요 태극기의 물바다였다. 이 시위에서 공과 권영대 변상헌 등은 피신하여 일헌병의 체포를 면하였는데 이는 후일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현의거 1주일 후인 4월 3일(음 3월 3일) 삼진에서 일어난 의거는 수원 선천 수안의 그것과 더불어 기미독립만세운동의 4대 의거로 손꼽힌다. 이에 관하여 당시의 공의 재판기록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피고 권태용은 한국을 독립시키려는 목적으로써 대중을 취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고 시위운동을 할 것을 기도하여 대정 8년 4월 2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근곡리 거주 황치순에 대하여 명3일 대중이 취합하여 양촌리 방면으로부터 진동 읍내를 향하여 행진할 것인즉 이에 참가하라고 선동하고 이어 율치리 김순삼 방에서 동면 근곡리 거주 김영종에게 대하여 명3일 독립운동을 할 것인즉 참가하라는 취지로 선동하고... 」 주문에서는 「징역 1년에 처함」이라고 하였다. 공은 두 차례의 의거 후 곧 만주로 탈출하였다가 미기에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서울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니 망명 생활은 비록 동지들과 상종하였다고는 하나 풍우에 굶주림과 헐벗음과 나라 잃은 백성에 대한 박해와 부모처자에 대한 향수와 고독이 공의 심신을 병들게 하고 있었으니 그 괴로움이야 어찌 수년의 형옥에 비하랴. 그 후 다시 적국 일본으로 밀입하였으나 미구에 고종하시니 1936년 병자 4월 26일이요 향년이 51 탑동 장재산 건좌에 영면하니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못 보고 돌아가셔서야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배는 밀성박씨 두효의 여로 휘 월선이며 1887년 정해에 출생하여 1926년 6월 12일에 졸하니 공과 쌍분이다. 슬하에 1남이니 영홍이요 진양강씨 만수의 여 순이를 취하였으며 그 남에 오준 오수요, 오준의 남에 경국 경도며 오수의 남에 경사다. 하루는 공의 당질 영해가 찾아와 묘명을 청하거늘 생각컨대 공과 나의 선고는 동지로 두 의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일제하의 질곡 속에 형극의 길을 걸은 분이라 흔쾌히 붓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