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43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선생은 광산김씨니 이름은 규현이요, 호는 금강으로 1903년 6월 12일에 출생하셨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에는 3.1만세운동의 대열에 서서 일제의 ○○를 치루었고 귀향하여서는 야학을 일으켜 이 땅의 가난한 아들 딸들을 모아 우리의 글과 얼을 심으셨다. 이로하여 일경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 감시의 눈초리를 견디다 못해 유랑하여 끝내는 1933년 2월 19일 이역 만주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1세이셨다. 돌아가셨어도 고국에 못 돌아오시고 만주에서 영면하시니 애닲음이 이에 더함이 있으랴. 경주김씨와 사이에 무사하여 입양하니 영안이다. 돌을 세워 그 공을 기림에 이에 찬하되
그 절조가 어찌 산만을 높다 하랴. 그 은공이 어찌 바다만을 넓다 하랴. 천고에 낡지 아니함이요. 만세에 썩지 아니함이니 이 돌과 더불어 영원하리로다. 1979년 5월 일
그 절조가 어찌 산만을 높다 하랴. 그 은공이 어찌 바다만을 넓다 하랴. 천고에 낡지 아니함이요. 만세에 썩지 아니함이니 이 돌과 더불어 영원하리로다. 1979년 5월 일
선생은 광산김씨니 이름은 규현이요, 호는 금강으로 1903년 6월 12일에 출생하셨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에는 3.1만세운동의 대열에 서서 일제의 ○○를 치루었고 귀향하여서는 야학을 일으켜 이 땅의 가난한 아들 딸들을 모아 우리의 글과 얼을 심으셨다. 이로하여 일경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 감시의 눈초리를 견디다 못해 유랑하여 끝내는 1933년 2월 19일 이역 만주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1세이셨다. 돌아가셨어도 고국에 못 돌아오시고 만주에서 영면하시니 애닲음이 이에 더함이 있으랴. 경주김씨와 사이에 무사하여 입양하니 영안이다. 돌을 세워 그 공을 기림에 이에 찬하되
그 절조가 어찌 산만을 높다 하랴. 그 은공이 어찌 바다만을 넓다 하랴. 천고에 낡지 아니함이요. 만세에 썩지 아니함이니 이 돌과 더불어 영원하리로다. 1979년 5월 일
그 절조가 어찌 산만을 높다 하랴. 그 은공이 어찌 바다만을 넓다 하랴. 천고에 낡지 아니함이요. 만세에 썩지 아니함이니 이 돌과 더불어 영원하리로다. 1979년 5월 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436 비보림 끝단 광산김씨 세거지 옆 금강 김규현공 기적비와 추모비를 찾아왔다.
光山金氏 世居地(광산김씨 세거지)
愛國志士 金剛 金奎鉉公 紀蹟碑(애국지사 금강 김규현공 기적비)
愛國志士 金剛 金奎鉉公 紀蹟碑(애국지사 금강 김규현공 기적비)
공은 서기 1903년 7월 29일(음 6월 6일)에 출생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서기 1919년 당 17세에 동년 3월 28일 오후 1시경에 고종형 권영대 등과의 주도로 고현시장과 진동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이어 4월 3일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면이 연합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를 삼진의거라 한다. 공은 이 삼진의거의 주동자 한사람으로 왜경에 체포되어 동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동년 10월 3일에 출옥하였다. 그 후에는 야학을 이르켜 가난한 이웃이 아들 딸들을 모아 우리의 글과 얼을 가르치고 심었다. 이로 인하여 왜경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 감시의눈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끝내는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시지 못하고 만주국 요양현 요양 신시가 189번지에서 영면하시니 향년 31세로 서기 1933년 3월 14일(음 2월 19일)이다. 다행이도 정부에서 그 공훈을 기려 서기 200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경주김씨와 사이에 무사하여 입양하니 중씨 창현의 자 영안이다. 공의 고귀한 그 절조 어찌 산만 높다하면 그 은공 또한 바다만 넓고 깊다 하리오. 공의 많은 행적을 줄여 이 돌에 새겨 남기니 만세에 변함없이 이 돌과 더불어 영원하리라.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일부 발취하여 기합니다.)
서기 2012년 4월 광산김씨 장악원 문중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서기 1919년 당 17세에 동년 3월 28일 오후 1시경에 고종형 권영대 등과의 주도로 고현시장과 진동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이어 4월 3일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면이 연합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를 삼진의거라 한다. 공은 이 삼진의거의 주동자 한사람으로 왜경에 체포되어 동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동년 10월 3일에 출옥하였다. 그 후에는 야학을 이르켜 가난한 이웃이 아들 딸들을 모아 우리의 글과 얼을 가르치고 심었다. 이로 인하여 왜경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 감시의눈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끝내는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시지 못하고 만주국 요양현 요양 신시가 189번지에서 영면하시니 향년 31세로 서기 1933년 3월 14일(음 2월 19일)이다. 다행이도 정부에서 그 공훈을 기려 서기 200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경주김씨와 사이에 무사하여 입양하니 중씨 창현의 자 영안이다. 공의 고귀한 그 절조 어찌 산만 높다하면 그 은공 또한 바다만 넓고 깊다 하리오. 공의 많은 행적을 줄여 이 돌에 새겨 남기니 만세에 변함없이 이 돌과 더불어 영원하리라.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일부 발취하여 기합니다.)
서기 2012년 4월 광산김씨 장악원 문중
김규현 선생 추모비도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金奎鉉 先生 追慕碑(김규현 선생 추모비)
金奎鉉 先生 追慕碑(김규현 선생 추모비)